남산의 부장들(The Man Standing Next, 2020)

<남산의 부장들>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라 프랑스 파리에서 이례적으로 방돔 광장에서의 촬영을 허락했다고 해, 방돔 광장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서 보기 시작했다.

 

전국민이 다 아는 박정희 암살 사건, 10·26 사태를 다룬다. <그때 그 사람들> 이후론 15년만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검은 화면에 적힌 하얀색 글씨. 동아일보에 연재된 <남산의 부장들>을 바탕으로 몇몇 픽션을 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10월 26일 사건 발생 장소에서 사건을 도모하는 김재규(영화에서는 김규평)의 등장. 부하들에게 권총을 보이며 작전에 대해 이야기한 후,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에 들어간다. 문이 닫히고, 총성이 들린다. 전형적인 플래시포워드 기법.

 

곧바로 또 설명이 나온다.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뒤 생겨난, 남산으로 상징되는 중앙정보부의 권력. 영화 제목인 '남산의 부장들'이 어떤 의미인지 친절히 알려준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무대를 미국 워싱턴으로 옮긴다. 전 중앙정보부장인 박용각(김형욱)이 박정희 정권의 실체를 폭로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 일명 코리아 게이트. 그런데 영화의 실질적 주인공은 김규평 중앙정보부장이다. 김규평은 박용각을 막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가 설득하고 회유한다. 박용각은 박정희에게 정보부장보다 더 위의 심복이 있고, 그가 박정희의 스위스 비밀 계좌를 모두 관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김규평은 그 말을 듣고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는 동아일보 기자였던 김충식이 쓴 <남산의 부장들>이나 김재규의 변호인 안동일이 쓴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를 비교해가면서 봐야겠지만.. 많은 부분이 디테일하게 다뤄졌음은 분명하다.

 

영화는 40일 동안 김규평이 겪은 일과 심정의 혼란을 위주로 보여준다. 밖에서는 박통을 함께 끌어내리자는 유혹의 손길을 건네오고, 안에서는 청와대가 도청당할 동안 알아채지도 못하고 뭐 했냐는 압박과 제 친구를 죽인 놈이라는 비난을 받고, 심심하면 탱크차를 거리에 내보내 주민을 놀라게 하고 부산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에도 탱크차로 밀어버리자며 아무렇지 않게 학살을 도모하는 분위기니 갑갑한 상황. 김규평의 의심이 깊어지고 박통의 그에 대한 실망과 배척이 심해질수록 정치적 이견 또한 분명해져 가고, 후반부에 가서는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라고 화까지 낸다. 실제 김재규가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영화에서도 이병헌의 알듯 모를듯한 내면 연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재규의 증명 사진을 보면 이병헌과 꽤 비슷한 모습이라서 신기하다. 사건 현장 검증 사진이나 다른 각도의 사진을 보면 안 닮았지만..

 

박부장이 알제리 무장 남성 3인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하여 찾은 마을은 어디일까. 파리 근교라는 정보뿐이네..

 

이성민 배우의 평소 이미지를 생각하면 박정희와는 도저히 매칭이 안 되는데.. 이 영화에서 살을 쏙 빼고 스타일링을 꽤 비슷하게 하고 나오니.. 배우의 개성보다 확실히 박정희라는 캐릭터가 먼저 보였다. 분명 이성민인데 이성민이 아니야. 등장인물 중에 가장 놀라웠다.. 다만 사투리 연기는 의도한 것이겠지만, 생각보다 사투리를 안 써서 당황했다. 네이티브이신데.. 아무튼 상상과 달라서 어색한 느낌. 굳이 비교해보려고 학살자·독재자의 흑백 영상을 찾아보고 싶지는 않으니 사색은 여기서 종결.

 

곽상천(차지철) 경호실장은 진짜 꼴보기 싫은 캐릭터다. 현대사회에도 조직마다 하나쯤은 꼭 있을 법한.. 알랑방귀의 대가이자 인권감수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을 수 없는 인간. 이희준이 실제 인물과 비슷해 보이도록 25kg이나 살을 찌워 연기했다고 한다. 연기 너무 잘해서 얄밉네.. 내가 본 이희준 배역 중에 가장 적역인 것 같다.

 

데보라 심(수지 박 톰슨)은 김소진이 연기했는데.. 정말 너무 빛나는 존재감이야.

 

마지막에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암살한 뒤에 부하들과 차를 타고 가다가 영화가 사실상 끝난다. 김재규가 막상 총을 겨누고 사람을 쏘는 동안, 감정이 마구 흔들리는데, 무슨 거대한 영웅인 것처럼 포커페이스로 표현하지 않아 좋았다. 쿠데타가 실패할 거란 결말을 예상하게 했고. 이후에 김재규가 체포된 정황과 교수형에 처해졌단 이야기는 영화가 아닌, 글씨로 보여준다. 또. 그게 가장 극적인 마무리라고 생각한 건가. 개인적으로 되게 미완성인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김재규의 심란하고 불안한 마음까지 다 내비친 거면, 차라리 체포되는 것까지 보여주는 게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그러다 갑자기 그 문제의 스위스 계좌가 든 금고를 전두환 역할의 배우가 뒤져 모든 걸 챙기는 장면이 등장한다. 비유적으로건 뭐건 맞는 이야기긴 하지만.. 끝에 가서 바람이 슝 빠지는 느낌. 이 장면의 연출이 꽤.. 어색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금고에서 이것저것 챙겨 박통의 방을 떠나던 전두환이 갑자기 멈춰서서 굳이 카메라 쪽을 응시한다던가(사실은 박통의 책상을 바라보는 거지만, 정면에 가까운 측면 응시다), M자 탈모 가발이 정말 티가 난다던가, 배우가 전두환과 전혀 닮지 않았다던가.

 

그러고 나선 다큐멘터리처럼 실제 전두환의 취임식 사진에 전두환 10·26사태 브리핑 육성, 사건 현장 사진과 법정 사진에 김재규 최후 진술 육성을 집어 넣은 것이 영 엉성한 마무리로 느껴졌다. 그렇다고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비판할 순 없지만, 극적인 부분이..

 

이야기 자체가 감동적이거나 천인공노할 소재도 아니고, 그냥 역사시간에 배울 때처럼 싸늘한 시선으로 보게 되는데, 픽션을 더했지만 교육적인 목적에 의미를 더 둘 법한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졌다. 흥미로 따지면 김재규의 변호인 안동일이 쓴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이 더 재밌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