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로우(The White Crow, 2018) #루돌프누레예프

하얀 갈매기, 러시아어로 belaya vorona는 주변인과 어울리지 못 하는 독특한 사람, 사회적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 나중에 백조로 밝혀지는 미운 오리 새끼 같은 존재인 듯.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태어난, 타타르계 태생의 발레 무용수 루돌프 누레예프. 그는 개성 강하고 고집 세고 규칙과 계급을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고 어릴 때부터 '하얀 갈매기'로 불렸다. 소련에서도 꽤 잘 나가는 무용수였지만, 서방으로 망명한 뒤 영국 로열 발레단과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에서 활약하며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무용수로서 안무가로서 전설적인 발자취를 남긴 사람. 미국 발레계에서 소련 출신의 조지 발란신이 여전히 추앙받는다면, 프랑스 발레계에선 루돌프 누레예프가 그런 인상이다.

 

그의 망명기를 주제로 한 영화 <화이트 크로우>를 만든 이는 영국의 명배우이자 감독 랄프 라인즈. 루돌프 누레예프의 개인적인 삶이 이렇게 복잡한 줄은 처음 알았다. 영화는 그의 생을 탄생부터 망명 직후까지만 다룬다. 1961년, 키로프 발레단(지금의 마린스키 발레단) 단원들은 프랑스 파리 순회 공연을 위해 출장길에 오른다. 파리에 도착한 뒤 서방의 풍경과 예술, 문화를 접하는 예술가들. 감독은 이들이 파리에서 머무는 한 달 가량의 시간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면서 사이사이에 누레예프의 과거 회상 장면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누레예프가 태어나는 장면, 온 가족이 한 침대에서 자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군 생활로 몇 년 동안 집을 비운 아버지와의 첫 만남 같은 재회, 아버지와 사냥을 떠난 일,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얻게 된 발레 티켓으로 처음 예술을 접한 덕분에 무용수가 되기로 한 일, 발레학교에서 타타르 전통 춤을 추고 발레 움직임을 배운 일, 타타르족 엄마의 아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눈빛 등.. 아역 배우가 너무 귀여워서 더 뇌리에 깊게 남았다. 배우 이름은 Maksimilian Grigoriyev. 아무 정보가 없다ㅜㅜ

 

랄프 라인즈 감독과 누레예프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아역 배우.

 

누레예프 역할은 올렉 이벤코(Oleg Ivenko)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무용수가 맡았는데, 루돌프 누레예프와 생김새가 정말 닮았다. 올렉 이벤코도 누레예프와 같은 타타르족인 데다, 그의 다무진 테크닉까지 닮았다. 이 배우가 발레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건 다섯살 때, 발레전문학교에 들어간 건 열다섯. 그로부터 3년 뒤에 극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국제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아마 이 계기로 캐스팅 제안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처음 캐스팅 제안이 온 메일을 보고는, 스팸인 줄 알고 삭제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느 발레단에 소속되지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듯하다.

 

파리에 도착한 누레예프는 곧장 숙소에 들어가지 않고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산책을 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그를 유독 날카로운 시선으로 감시하는 KGB 요원들. 누레예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윗분들께서 정해준 규칙을 깨가며 외국인에게 말을 걸고 친구 사이가 된다. 그리고 매일밤 이들과 외식을 하거나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때 만나는 클라라 생 역할은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가 맡았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아델이다. 얼마 전 남자친구를 교통사고로 잃고 슬픔에 빠져 있다가, 동방(소련)에서 온 감수성 풍부한 남자에게 호기심과 연민을 느끼는 캐릭터인데, 섬세한 연기를 너무 잘 함. +단발병 걸릴 뻔..

 

누레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틈만 나면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가서 예술 작품을 감상했는데, 파리에서도 새벽부터 외출하곤 미술관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온갖 작품을 감상한다. 예술가이면서도 늘 자유를 억압받던 상황, 예술 작품을 보고 즉각적인 경탄을 표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타고난 섬세한 감수성 덕분인지 눈동자만큼은 늘 경이에 차서 흥분해 있다.

 

누레예프의 무용 실력에 대한 언급도 여러 번 나온다. 그는 실제로 전시 상황 때문에 바가노바 발레학교에 비교적 늦은 나이인 17세에 들어가는 등 높은 수준의 발레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영화에서는 꼬맹이 시절 발레를 배우는 장면이 나오지만.. 늘 자신의 발레 실력을 평가받고 싶어하고 더 잘 추고 싶어한다. 프랑스에서 만난 예술가는 누레예프에게 테크닉이나 라인은 덜 완성됐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스피릿이 있다고 평한다. (누레예프의 생애를 설명한 국내 블로그 글 중에.. 그가 타타르인 특유의 야성적인 분위기가 있다고 하는데.. 타타르인이 정말 그런 민족인진 모르겠다.)

 

영화에서 묘사된 누레예프에게는 조금 이상한 성격도 있다. 그런 성격은 유독 클라라 생과 있을 때 드러났다. 클라라의 도움을 받아 장난감 기차를 사러 갔을 때 점원이 보여주는 기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마구 성깔을 부리던 장면. 그리고 클라라와 러시아 식당에 가서는 러시아인 웨이터가 자신을 깔보는 눈빛으로 쳐다본다며, 분명 자신이 바쉬키르어쩌구 변방에서 온 촌놈이라고 무시하고 있을 거라고 마구 화를 내다 못해, 클라라한테 'fuck Paris, fuck you'라는 대사까지 내뱉는다. 클라라는 '너 나한테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누레예프는 꼼짝도 안 하고, 클라라는 자리를 뜬다. 그러곤 클라라와 재회했을 때 누레예프는 기억 안 나는 척(또라이;;)하며 다시 생글생글 웃는다. 클라라는 그냥 널 용서하기로 했다며 마음을 푼다. 정말 변방에서 온 촌놈이라 불쌍했나봐. 황당한 시츄에이션.. 아무튼 실제로든 영화로든 클라라와 절대 썸조차 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에발 우정만 간직했길. (게이로 알려져 있지만 여자도 꽤 만났기에)

 

아 그리고 수업 참관을 온 발레단 마스터에게 '당신 방금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한 거냐(딴 얘기 했음)' '당신이 뭔데 이 수업에 들어와 맘대로 평가하냐'며 갑자기 화를 내기도 했다. 대단한 예술가인 만큼 대단한 인성.

 

파리 숙소 룸메이트 '유리' 역할은 세르게이 폴루닌이 맡아서 연기했다. 금발로 염색해서인지 (안면인식장애 때문인지) 전혀 못 알아봤다. 처음 서방의 친구들과 외식하러 갈 때, KGB 요원이 (서방의 눈길을 의식해서) 허락을 해주긴 했는데 다른 소련 사람을 데려가라 해서 그와 동행하기도 한다. 나중에 노래 부르던 장난감 기차를 사서 같이 갖고 놀던 것도 세르게이였다.. 비교적 얌전한 캐릭터로 나온다.

 

엔딩 내용인데 스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키로프 발레단은 파리에서 런던으로 건너가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KGB 요원이 누레예프 너는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정치인이 너를 발레 갈라에서 보고 싶다고 하니, 모스크바 공연에 참여해야 한다고. 누레예프는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왜 자신만 모스크바로 가야 하냐고, 나도 다른 단원들과 런던에서 춤추고 싶다고 외친다. 그러자 요원은 너네 엄마가 아파서 그런다고 갑자기 말을 바꾼다.

 

누레예프는 더 초조해져서 프랑스인 남성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자리를 뜨지 말아 달라고. 아마 자신을 아는 목격자가 있는 한 요원들이 허튼 짓은 못할 거라 생각한 것 같다. 그 친구도 자리를 지키느랴, 당장 어찌할 수가 없으니 주변 사람에게 부탁해서 클라라에게 전화에 이곳에 와달라 전해달라 한다. 도착한 클라라는 공항 경찰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경찰은 그 러시아인이 과학자가 아님을 확인받고는, 정치적 망명을 위한 규약을 알려준다. (과학자를 망명시키면 국가 기술을 빼돌렸단 식으로 몰아가나 봄.)

 

프랑스 경찰이 먼저 다가가 그를 데려올 수는 없다고, 그가 먼저 우리에게 와서 망명을 원한다고 요청해야 한다고. 클라라는 마지막 인사를 하는 척하며 누레예프에게 방법을 알려준다. 누레예프는 망설이다, 자신은 자유를 원함을 결심한다. 그리고 경찰에게 다가가 망명을 요청한다. KGB 요원은 마지막 독대를 요청하며 너네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 같냐고 정신 차리라며 협박하지만.. 누레예프는 끝내 자유를 되찾는다. 이 모든 상황이, 총칼이라는 물리적 위협 없이 말과 눈빛, 행동만으로도 충분한 긴장감을 자아낸다. (아시아의 경우였다면.. 인정 사정 없이 망명 희망자를 죽이고 요원도 같이 죽어버린다거나 하면서.. 별 드라마를 다 썼을 것 같다ㅜㅜ)

 

 

누레예프의 전기 같은 걸 공부하고 나서 보면 훨씬 더 이해가 잘 되고 재밌을 것 같은 영화. 그래도 억압된 체제에 속한 예술가가 자유(와 평등과 박애)에 눈을 뜨고 빼앗긴 자유를 되찾는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히 통쾌하다.

 

 

이 영화를 계기로 타타르인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됐다. 영화에서 그가 타타르인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스카프를 쓴 어머니와 누나들의 외양만 봐도 혈통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누레예프 어머니의 출생지가 바로 타타르스탄 자치 공화국의 수도 카잔이다. 이곳 사람들은 루돌프 누레예프에 이어 올렉 이벤코가 서방에서 성공한 사실을 무척 뿌듯하게 여기고 있단다.

 

타타르족은 튀르크계 민족인데 타타르어를 구사하고 많은 이가 수니파 이슬람교를 믿는다.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지에 거주하는데 러시아에 사는 사는 타타르인은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중국 신장 위구르에도 타타르인이 살고 있는데, 또 다른 튀르크계 무슬림 민족인 위구르족과는 또 다르게 구분되는 모양이다. 언어 때문인가.. 세상에는 인종 말고도 민족이 너무 많다. 파고들수록 헷갈린다.. We are the world를 외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

 

넷플릭스에서 시청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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