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파리에 가다(Emily in Paris, 2020) #넷플릭스

 

 

1. 어제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릴리 콜린스 주연, <섹스 앤 더 시티>의 프로듀서 대런 스타가 <에밀리, 파리에 가다>의 총괄 프로듀서다.

 

2. 대런 스타, 이제는 옛날 사람이군요. 옛날이고 자시고 인생에 대한 통찰이 이렇게 얕으시다니.. 90년대 스타일의 반복. 더 이상 트렌디하지 않음. SNS 마케팅이라는 소재를 끌어와서 좀 현대적으로 보일 뿐이지, 선진적인 구석이라곤 1도 없다. 아, 사무실에 흑인 1명, 사적 영역에 아시아인 1명 끼워서 좀 더 다문화적인 척한 건 발전적이라 봐야 하겠지.. 솔직히 이 드라마가 패션 룩북으로서의 가치 말고 뭘 갖고 있는지 모르겠음. 민족과 문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적으로 과장해서 소름끼치게 구시대적이다.

 

3. 그럼에도 애슐리 박의 참을 수 없는 존재감은 너무 빛났다. 오래 전부터 릴리 콜린스한테 별로 매력을 못 느껴서인지.. 아무리 릴리 콜린스가 스타라지만, 그 옆에 서 있어도 존재감이 절대 꿀리지 않는 애슐리 박. 일단 뮤지컬 배우 출신이라 그런지 발성, 발음이 너무 좋다. 화려한 패션도 너무 잘 소화해. 릴리보다 더 소화력이 뛰어난 것 같다. 절대 같은 한국인이라 편 드는 거 아님. 정말 사람 홀리는 매력 있는 배우인 듯.

 

4. 릴리 콜린스. 딱히 예쁜 줄도 모르겠고, 왤케 잘 나가는지는 더 모르겠고, 그냥 보고 있으면 늘 눈썹이 이어질 것만 같다, 정도가 내 감상이었는데. 파리에 가서도 크게 다르지 않네. 레이첼 맥아담스가 아무리 예쁘고 사랑스러워봤자 프랑스에 갔더니 미국 여자일 뿐이었다는 표현처럼(<미드나잇 인 파리>).. 릴리 콜린스도 그냥 미국 여자일 뿐이었다.. 배경도 파리에, 화려하고 컬러풀한 명품으로 치장을 했는데도, 내겐 그냥 향기 없는 꽃 같은 느낌.. (난 ㄱ태희도 그렇게 느껴..)

 

 

 

5. 프랑스라는 나라에 환상에 젖은 아메리칸 걸들의 환상을 대리 충족시키고 더 키우는 작품. 물론 아메리칸 걸로서 실망하는 면모도 많이 보여준다. 끝없이 불륜을 저지르려는 프랑스 남자들의 습성(이건 한국도 마찬가지일 텐데, 특히 외국인에겐), 프랑스 사람들은 워라밸이 더 중요해서 성과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클라이언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하는 중후반부 전개와 모순되는 동료의 초반부 서술), 누드로 등장하는 친구 아빠(이건 무슨 스테레오타입? 샴페인 병으로 아슬하게 성기 부분을 가리는 건.. 보고 웃으라는 건가?), 미성년자 아들이랑 섹스한 성인 여성을 불러다가 아들의 성 능력을 캐묻는 엄마(;;;;;;).. 기억에서 지우기가 힘드네. 아무튼 프랑스 사람들이 보고 기뻐할 것 같진 않다.

 

6. 에밀리 혼자 패션쇼를 한다. <섹스 앤 더 시티> 제작자인 데다가 배경이 파리니까 당연히 엄청난 협찬이 붙었겠지만. 투머치다 투머치. 드라마 배경이 패션쇼장도 아니라 창피해서 길을 못 걸을 것 같은 수준.. 화려한 패션이 너무나도 튀고 미국적인데, 그걸 제작진도 너무 잘 아는지, 에밀리랑 중국인으로 나오는 민디만 그렇게 입히지,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처럼 입고 나온다.

 

7. 에밀리는 시카고에 있는 마케팅 회사 직원이다. 이 회사에서 갑자기 프랑스의 (작지만 너무 탄탄한)마케팅 회사 하나를 인수하고, 그 조건으로 직원 하나를 파견하기로 했다. 그게 프랑스어가 가능한 에밀리 상사 매들렌이었는데, 매들렌이 갑자기 임신을 하는 바람에 프랑스행을 포기하고(임신했다고 외국엘 못 가..? 이건 뭔..) 그 기회를 에밀리에게 넘겨준다. 횡재다.. 에밀리는 분명 경력이 적지 않은, 적어도 대리급의 마케터일 텐데.. 배우의 나이를 생각해 봐도 20대 후반일 거고.. 그런데 내뱉는 대사나 행동의 수준은 인턴급이다. 프랑스를 SNS 마케팅에 무지한 나라라고, 일단 시선을 내리깔고 시작한다. "여봐라 아름답지만 구시대적인 프랑스야, 내가 바로 아주 쌔끈한 SNS 최첨단 마케팅을 보여줄게^^" 이런 느낌인데. 제시하는 솔루션이나 설득하는 내용은 너무나도 원론적이고 초보적인 수준이야. 현직 마케터가 아니더라도 직장인들이 보면 아주 기가 막혀서 환장할 듯. 요즘은 대학생도 저 정도 수준은 아닐 텐데.. 그런데 웃긴 것이, 에밀리가 제시하는 모든 솔루션이 드라마 안에선 다 너무 잘 먹힌다는 것. 비현실적인 설정의 끝. 그런데도 에밀리의 당당하고 뻔뻔하고 해맑은 태도는.. 마치 트럼프를 떠올리게 한다. 트럼프의 잘 웃는 버전.. 너무 뻔뻔하거든.. 그게 미국인이 바라는 정신 승리의 형태인가봐.

 

8. 그리고 인수한 기업에 본사 직원을 파견한다는 것은 너네의 수익구조, 업무 환경을 모두 감시하겠어, 같은 의미일 텐데. 에밀리는 정말 그냥 인턴 직원 같아.. 여름방학을 맞아 미국에서 온 낙하산 인턴.. 이 설정부터가 얼마나 만화적이냐고.

 

9. 프랑스 마케팅 회사의 새 대표는 실비다. 필리핀 르루아-보리외라는 배우가 연기하는데, 정말 우아하고 멋지다. <연예인 매니저로 살아남는 법>에서 마티아스(매니저 중 불륜을 버릇처럼 일삼는 중년 남성)의 아내 카트린 역할로 나왔다. 실비는 아묻따 에밀리를 싫어하고 밀어낸다. 전형적인 여적여 갈등 구도를 만들려고 한 것 같은데.. 정말 맥락 없다. 실비는 고객사이자 성공한 조향사인 앙투안과 오랜 불륜 사이다. 유부남 앙투안의 세컨드(;;).. 앙투안이 에밀리에게 관심을 보이자, 실비는 에밀리를 더 더 싫어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배우를 이다지도 평면적이고 재미없는 캐릭터로 활용하다니. What a waste! 그리고 실비의 올블랙 패션이 에밀리의 컬러풀한 패션보다 훨씬 아름답다.

 

 

 

10. 에밀리의 시카고 남자친구는 파리에 놀러오기로 해놓고.. 항공권도 예약해놓고 갑자기 당일날 안 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장거리 연애를 할 줄 모른대. 시카고에 돌아오래.. 멍청해... "스포츠 경기 보러 가려고 그러는 거지 너?" 에밀리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잘 한 일이 걔랑 헤어진 거다. 앙투안의 추파는 거절하고, 아랫집 남자이자 요리사인 가브리엘과 잘해보려는 찰나, 가브리엘의 여자친구 카미유가 등장한다. 여자친구 있다고 말도 안 하고 바람 피려고 한 남자.. 그래서 가브리엘과는 어색한 친구로 지내고,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기호학 교수와 연애를 시작한다. 에밀리와 격정의 밤을 보낸 뒤에 아침에 샤워도 안 하는 남자.. 네 향기를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래.. 결국 재수없음과 속물 근성 때문에 헤어진다. 생마르탱 운하가 예쁘다며 걷는 비-파리 출신인 3명 앞에서 관광화되어서 요즘은 별로라며 일침을 놓아서 이미 가브리엘의 미움을 샀다. 결정적으로 에밀리의 초대로 발레를 보러 갔는데 작품이 <백조의 호수>라는 걸 알고, <백조의 호수>는 관광객들이나 보는 작품이며 자긴 <볼레로>를 훨씬 높이 산다며 비판하더라고. 뭔 개소리야..

 

11. 아무튼 에밀리의 주변에는 끝없이 프랑스 꽃미남들이 등장한다. 드라마니까 그렇지. 이 남자 저 남자와 시시덕거린다. 릴리 콜린스랑 되게 안 어울리는 캐릭터 설정이다..

 

12. 한 번은 앙투안네 향수 CF 촬영 현장에 따라 갔는데, CF 내용이.. 여자 모델이 갑자기 정장 차려입은 남자들 대열 사이에서 혼자 벌거벗고 향수 하나만 걸치고 알렉상드르 다리 위를 거닌다는 내용이다. 에밀리는 바로 성차별적이라는 지적을 하고, 앙투안과 실비는 에밀리와 대적한다. 미국 사람들이 과하게 군다는 식의 대화.. 실비는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아무튼 시청자가 복엔 엄청 빡치는 신인데.. 촬영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다음 미팅에서 앙투안은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냐며 에밀리를 도발한다. 에밀리는 이걸 SNS에 올려 투표를 받아보자며 제안한다. 섹시함인가, 성차별주의인가. 투표 결과가 뭐든 홍보 효과는 뛰어날 거라며. 그냥 에밀리의 재기발랄한 아이디어가 또 통했다는 식으로 어물쩡 종결되는 이상한 에피소드. 최악..

 

 

 

13. 에밀리의 중국인 친구 민디는 원래 중국에서 가수를 꿈꾸던 갑부 딸이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삑사리 한 번 낸 걸로 전국민의 망신을 산 에밀리는 파리로 도망쳐서.. 백인 가정의 보모로 일하고 있다. 애들을 돌보면서 중국어를 가르치라는 명목으로. (애슐리 박의 중국어 발음은 별로다..) 에밀리는 마냥 파티걸인 줄로만 알았던 민디가 노래를 잘한다는 걸 알곤 노래를 해보라고 한다. 그래서 뜬금없이 공원에서 라비앙로즈를 부르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막 환호하고 그런다. 노래 정말 잘하고 감동적이긴 한데.. 좀 뜬금없는 것도 사실이다. 뮤지컬 배우 출신이니 노래하는 재능을 활용하고 싶었겠지. 결국에는 민디의 상하이 친구들이 파리에 놀러와서는 민디가 드랙퀸 클럽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거금을 들여 판을 깔아준다. 차이니즈 머니 이즈 그레이트, 또 한 번 중국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이렇게 소비한다.

 

14. 보다가 <가십걸> 스포당했다.

 

15. 아, 장점 하나 더 있다. 대런 스타라는 이름값 덕분인지, 끝없이 북적거렸을 파리의 관광지에서 용케 촬영을 해냈다. 파리 관광지 이곳저곳을 감상할 수 있는 드라마다.

 

16. 베드씬 중에, 한 번은 에밀리가 남자에게 천천히 하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영어에선 분명 "Slower. Slower, You're supposed to savor it."이라고 하는데, 한글 자막에선 "천천히 먹어요. 맛을 즐겨야죠."라고 말한다. 풍미를 뜻하는 savory라는 표현이 나왔다고 해서.. 먹으라는 단어를 쓰다니? '천천히 음미하라'는 표현을 두고 왜 굳이.. 미친 거 아닌가.. 개 구려..

 

17. 에밀리랑 민디는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 사이인데, 10회 내내 존댓말을 주고받는다. 번역을 왜.. 이렇게...

 

 

 

18. 에밀리는 파리에 도착한 직후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53명뿐이었는데.. 파리에서 찍은 사진을 몇 장 올리자마자 팔로워 수가 늘더니 결국 20만 명이나 된다. 아무리 SNS 마케팅의 귀재라는 어설픈 설정이지만, 그렇게 갑자기 맥락 없이 인플루언서가 된다고? 게다가 사람들 초상권을 개무시하고 사진을 찍어서 파리의 문화를 비웃는 듯한 해시태그를 달기도 한다. 아니.. 윤리는 어디 쌈 싸먹으셨나..

 

19. 심지어 전업 인플루언서 제안도 받는다.. 그러면서 인플루언서 마케팅에 돈을 쓰느냐, 홍보 에이전시를 이용한 마케팅에 돈을 쓰느냐, 하는 요즘 기업들의 고민도 조금 보여준다. 인플루언서들은 결국 자기 어필, 자기 사업 홍보하는 데 더 혈안이라며 당신네 기업이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에밀리가 주장하기도 한다. 본인이 홍보 에이전시 직원이면서, 인플루언서 행사에 참여해서 공짜로(웰컴 기프트를 대가로) 마케팅 콘텐츠를 퍼블리싱하는 모순을 저지르면서.. 물론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않고 또 어물쩡 넘어감.. 에밀리는 위대한 주인공이니까 인플루언서로도 살고 홍보 에이전트로도 살고.. 

 

 

딴지 걸고 싶은 부분들이 너무 많은데.. 너무 많아서 좀 지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