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다스의 개(Barking Dogs Never Bite, 2000) #봉준호 #배두나

1. 봉준호 감독의 입봉작. 이 작품으로 여러 국제 영화제에 초청되고 신인 감독상도 받았다.

 

2. 배두나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 거의 데뷔하자마자 찍은 수준의 초기작. 순수하고 다정한, 어떤 때에는 얼이 빠진 느낌도 드는 젊은 여인을 연기했다. 정말 최고로 귀엽다. 멍뭉미 장난 아님.

 

3. 이성재가 교수 지망생(?)이자 백수로 출연. 배두나와 함께 주인공이다. 말이 느린 연기가 인상적. 교수가 되려면 공부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뇌물을 갖다바쳐야 하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는 백수다. 어딘가에서 짖어대는 개 소리에 신경질을 내다가, 충동적으로 이웃집 강아지를 훔쳐 죽이려 든다. 옥상에서 강아지를 추락시키려는 차에, 무를 말리러 올라온 할머니를 마주하고 살생 미수에 그친다. 이번에는 지하실에서 두 번째 살해 시도를 한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는지, 강아지를 다시 내려 지하실에 방치된 장롱에 가두고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 강아지는 중성화 수술을 했는지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짖지도 못하는 개한테 복수를 하려고 한 걸까, 교수가 될 사람이 개멍청하다. 여기까지가 끔찍한 인트로다.

 

4. 배두나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경리로 일한다. 절친은 문방구 사장님. 이상하게 요즘 따라 아파트 단지 내 강아지 실종 사건이 잦다. 주인이 누구건 오지랖 발휘해서 물심양면으로 돕고 마음도 많이 쓴다. 그 탓이기도 하고 친구랑 농땡이 치느라 사무소 밖으로 자주 나도는데, 관리소장은 그의 잦은 외출을 못마땅해 한다. 세 번째 실종 사건의 피해자가 앞선 사건의 가해자라는 건 꿈도 못 꾼다. 친구와 함께 보내는 재미난 일상은 졸귀.. 눈 똥그랗게 뜨는 거 진짜..ㅠㅠ 배두나의 작은 꿈은 TV에 나오는 거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여기부터 영화 초중반부 스포일러

5. 이성재는 강아지를 찾는다는 벽보를 보고 지하실로 내려간다. 장롱을 열자 강아지가 없다. 인기척에 몸을 숨기고 보니, 경비원 변희봉이 강아지를 발견하고 잡아 먹으려는 듯 만반의 준비를 한다. 강아지는 장롱에서 이미 숨을 거둔 모양이다. 직접적인 가해 장면은 안 나오지만.. 이 부분 정말 끔찍하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운다면 이 영화 안 봤으면 좋겠다..

 

5-1. 이성재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옥상에서 마주친 할머니의 강아지를 또 훔친다. 이 강아지가 짖던 강아지거든. 이번에는.. 옥상에서 내던지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뒷)모습은 옆 동 옥상에서 망원경을 실험하던 배두나에게 목격된다. 배두나는 빨간 옷에 빨간 모자로 중무장한 이성재를 뒤쫓는다. 추종은 허무하게 실패로 끝난다. 이때 나오는 재즈 음악이 압권. 

 

5-2. 임신한 아내는 갑자기 강아지를 집에 데려온다. 돈 주고 샀다고. 이성재는 자신보다 새로 들인 강아지를 더 위하는 아내 때문에 섭섭하다. 가뜩이나 강아지가 미운데..

 

5-3. 무말랭이를 만들려던 할머니는 두 번째로 실종된 강아지의 주인이다. 벽보에 관리소 도장을 찍으러 왔다가, 배두나의 안내로 강아지 사체를 마주한다. 충격을 받고 쓰러진 할머니는.. 결국 끙끙 앓다 숨을 거둔다. 배두나는 강아지 시체를 땅에 묻는 일을 변경비에게 맡긴다. 변경비는 사람 좋은 척 굴다가 배두나가 자리를 뜨자마자 강아지를 건져.. 또 요리......

 

후반부 스포일러(는 간략하게)

6. 이번에는 이성재가 당할 차례. 아내의 잔소리에 산책을 나갔다가 강아지를 잃어버린다. 아내에게 죽고 싶지 않아 열심히 찾아헤맨다. 배두나는 벽보에 도장 받으러 온 이성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벽보 붙이는 일을 도와주고 말상대까지 해준다. 배두나가 할머니 돌아가신 일에 죄책감을 느끼자, 이성재는 아가씨가 아니라 강아지 죽인 놈이 나쁜 거라고 위로한다. 할머니는 배두나에게 유언을 남겼다. 옥상 위에 말려둔 무말랭이를 귀여운 아가씨가 다 먹으라고. 무말랭이를 가지러 간 배두나는 그곳에서 요리되기 직전의 강아지를 발견한다. 노숙자를 뒤로 하고 강아지를 들쳐 업고 도망친다. 또 한 번의 추격전. 친구가 그를 무찔러 준다.

 

6-1. 이성재는 임신해서 잘린 아내의 퇴직금을 늙은 교수에게 상납하기로 한다. 아내는 케이크 상자 아래에 돈뭉치를 차곡차곡 쌓는다. 술집에서 단둘이 만난 교수. 사실 한 명 더 있다, 교수 옆에 앉은 술집 접대부. 폭탄주를 연거푸 받아 마시고는 개가 되어 거리를 나뒹군다. 배두나는 관리소에서 잘리고 백수 신세가 된다. 술에 취해 거리를 걷다가 개가 된 이성재를 만난다. 이성재를 끝내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 이성재는 결국 바라던 교수가 됐고, 배두나는 즐겁게 숲속을 걷는다.

 

 

7. 기발한 코미디다. 일상 액션의 향연. 극적인 분위기를 강조하는 슬로 모션과 절묘한 음악의 배치. 지겹게 본 편집 기법인데 하나도 촌스럽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중간중간 나오는 촬영 구도도 실험적이다. 그리고 음악 진짜 잘 썼다.

 

8. 배두나의 친구 고수희의 연기가 정말 일품이다. 감초라 하기엔 격이 너무 높다.

 

9.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늘 찝찝하다. 또 "바로 그걸 노린 거"라고 하겠지만, 하도 매번 찝찝해지니까 짜증이 다 난다. 아무리 20년 전 영화인 걸 감안해도, '강아지' 소재를 통해 인간상의 부조리를 드려내려 한 의도를 백 번 이해해도, 굳이 꼭 그렇게 다뤘어야만 했나? 여러 측면에서 이해가 안 간다. 강아지를 두 마리나 납치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이성재는 아내를 조르고 졸라 결국 뒷돈으로 더럽게 교수 자리에 오른다. 권선징악은 바라지도 않는다. 이걸 왜 평화롭게 낭만적인 서사로 그렸는지 이해가 안 간다. 강아지 살해범이긴 하지만, 얘도 힘들어서 그래, 얘 봐봐, 얼마나 인간적이니? 라고 합리화해주고 있다.

 

강아지 두 마리를 요리한 변희봉도 물론 반성하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강아지를 직접 납치하고 죽인 당사자는 아니니 괜찮다는 건가. 보신탕 섭취를 기호의 문제라고 쳐도.. 그는 경비이고 어느 강아지가 몇 동 몇 호에서 기르는 것임을 아는 게 분명한데, 시체를 발견하고 맛있게 먹을 생각만 하다니.. 그 나이대 할아버지는 원래 양심없고 그러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라는 건가.

 

배두나의 순수함, 천진난만함은 배우가 귀여우니까 좋게 넘어간 거지, 영화 전체로 보면 이 캐릭터 설정이야말로 어처구니 없다. 너는 원래 멍청하니까 부조리한 진실을 굳이 알아챌 필요도 없으니, 적당히 피톤치드나 들이마시며 살라는 건가. 신이 봉감독이고 그의 세계 속에 사는 배두나가 인간이라면, 분명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린 신을 증오할 것이다. 괜히 사회에 딴지 걸거나 지랄 말고 타고난 대로, 속 편하게 생긴 대로 살라는 메시지로만 들린다. 알 권리는커녕 알 기회조차 주지 않아. 이건 <설국열차>에서도 그랬고 <기생충>에서도 그랬다. 엘리트 의식에 쩌든 음침함.. 사회의 부조리를 너무 따뜻하거나 재미있게 그려서, 대중이 현실에 안주하게 만드는 작품 세계. 논란만 일으키고 모션만 취할 뿐 결국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국열차>에서 최고 권력과 손잡은 반란 선동가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가난을 겪지 못했기에 더 나이브하게, 위

에서 저 밑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만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러워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