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놀라 홈즈(Enola Holmes, 2020) #넷플릭스

1. 시리즈 드라마일 줄 알았는데.. 123분짜리 영화 한 편이었다. 아무 부제도 달려 있지 않으니, 속편 계획도 없는 것 같아서. 일단 실망부터 하고 시작.

 

2. 낸시 스프링거(Nancy Springer)라는 미국 작가가 셜록 홈즈의 여동생 '에놀라 홈즈'를 창조해 청소년을 위한 미스터리 소설을 썼다. 셜록보다 스무살 정도 어린 열여섯 소녀로 설정.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총 10편의 소설책을 출간했다. 이 영화는 그 소설 중 첫 편 <에놀라 홈즈: 사라진 후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청소년 영화 느낌 물씬난다. 반응이 좋으면 속편도 만들겠지. 일단은 호평 세례라고 한다.

 

3. 두 오빠는 이미 장성해서 런던에 살고 있다. 한 명은 정부 관료, 한 명은 유명 탐정. 에놀라는 펜덜에서 엄마와 단둘이 지내며, 빅토리아 시대 또래 여성들이 배우지 않는 것들을 배운다. 과학 실험이라던가 주짓수라던가.. 그러다 어느날 엄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부분은 <리틀 포레스트>를 떠올리게 했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부재는, 엄마의 존재를 당연시해온 딸에게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대혼란을 주고, 모든 것을 다 해주는 엄마의 역할이 당연한 게 아니었음을 반성하게 하고, 또 원망하게 한다. <에놀라 홈즈>에서는 조금 다르다. 에놀라의 엄마 '유도리아 홈즈'는 대의를 품고 사라진 것이다. 사라진 날이 에놀라의 생일날이었으니, 생일 선물도 남겼다. 색연필 세트랑 꽃말 엽서.

 

3-1. 못 본 지 오래돼 에놀라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두 오빠는 엄마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본가를 찾는다. 이들은 에놀라에게 결혼을 해야 한다며 여학교에 입학해 신부 수업을 받을 것을 강요한다. 야성적인 본능을 길러온 에놀라에게 신부 수업이 가당치도 않다. 에놀라는 엄마가 남긴 메시지를 해독한 뒤, 엄마가 남긴 두둑한 지폐 더미를 챙겨 가출한다.

 

4. 사라진 후작은 누구냐. 남장을 하고 탄 기차에서 만난,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또래 남자아이다. 에놀라는 괜한 연민을 품고 제 갈 길에 훼방을 놓지 않고자 그를 외면한다. 하지만 암살의 위기에 놓인 그를 돕고야 만다. 함께 런던행 기차에서 뛰어내렸지만, 런던에서 같이 지내자는 남자의 제안은 단호히 거절한다. 이 남자아이가 사라진 배질웨더의 후작이다. 에놀라는 엄마를 찾아야 한다. 런던에 도착해 엄마의 흔적을 열심히 찾아보지만, 그 남자를 죽이려 한 암살자에게 쫓겨 자신이 죽을 위기에 처한다. 엄마를 찾기도 전에 자기가 죽겠다 싶어 결국은 사라진 후작 사건을 먼저 해결하기로 한다.

 

5. 에놀라는 계속 관객에게 말을 건다. 아주 가끔은 귀여운데, 대체로 대사부터가 재미없고 촌스럽다고 느꼈다. 카메라를 응시하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을 조금 줄였다면 좋았을 것 같다.

 

6. ENOLA라는 이름은 ALONE이라는 단어를 재배치한 것이다. 인생 원래 혼자 사는 거야. 그런 메시지인가 보다. 그래, 혼자 잘 살자.

 

7. 에놀라를 연기한 배우는 밀리 바비 브라운. 넷플릭스 시리즈 <기묘한 이야기>의 일레븐 역할로 유명해졌다는데 기억이 안 난다. <에놀라 홈즈>에서는 무려 프로듀서로도 참여했다. 2004년생인데 존멋탱구리♡ 배우가 직접 프로듀싱에 뛰어드는 현상이 우리나라에서도 비일비재했으면 좋겠다. 아무튼 연기가 정말 생생하다. 생기 넘치게 팔딱팔딱 잘 뛰어다니는 느낌. 2시간 넘게 안 나오는 장면이 거의 없는데,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만 빼고는 지루할 틈이 없다.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모험가 기질을 이렇게 잘 표현할 수 있는 배우가 또 있을까? 남녀노소 불문? 정말 대단한 연기력과 존재감이다. 막 예쁜 얼굴은 아닌데, 오히려 평범한 듯 조화로움에서 오는 멋짐이 있다. 앞으로가 정말 기대된다. 게다가 이제 겨우 열여섯살이다. 에놀라와 현실 동갑이다.

 

8. 역사적 고증이 얼마나 잘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미술적으로 아주 훌륭하다. 눈이 즐겁다. 모든 의상, 인테리어, 자연, 과거 런던의 풍경! 런던 여행의 갈증을 해소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다.

 

9. 유도리아를 연기한 헬레나 본햄 카터. 존재감이 과연 압도적이다.

 

10. 후작 역할을 맡은 루이스 패트리지도 꽤 매력적이다. 주인공인 밀리보다 훨씬 더 주목을 받는 듯하다. 어떤 사진은 마냥 애기같고 어떤 사진은 얼굴 골격 구조가 엄청 강렬하다. 꽃미남 그 자체.

 

11. 셜록 역할을 맡은 배우도 꽤 매력적이다. 셜록 하면 이제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대명사가 되어버렸는데, 현대판 <셜록> 특유의 무자비하고 시니컬한 소시오패스로서의 면모는 없다. 시니컬한 건 그대로인데, 은근히 다정한 오빠로 등장한다. 그 정도가 딱 좋았다. 에놀라가 주인공이니까. 그래서 배우 이름은 헨리 카빌. 섹시하고 귀여워.

 

12. 청소년 영화 내지는 가족 영화 같은 느낌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청소년들이 많이 보고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 하는 기대.

 

13. 스포일러 포함. 이 영화는 여성 참정권에 관한 이야기다. 유도리아 홈즈는 여성 참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여성들과 함께 모략을 꾸미고 있다. 그 일이 위험하고 극히 반사회적이기 때문에 딸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남성중심적인 사회에 아무런 문제를 못 느끼는 두 아들은 엄마의 뜻에 반대 의견만 냈겠지.) 사라진 후작도 아빠가 암살된 이후 본인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 암살을 공모한 자는 유산을 노렸을 법한 후작의 삼촌이 아니라, 후작의 할머니다. 후작의 아버지가 선거법 개정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후작의 아버지가 죽고 나면 삼촌이 투표권을 갖게 되는데, 삼촌이라면 가부장적인 사람이니 반대 표를 던질 게 뻔하기 때문이란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곧 있을 선거에서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친아들을 죽여버리고 손자까지 노리다니. 그놈의 명예가 뭔데, 전통이 뭔데. 영화의 배경이 딱 1900년일 테니, 여성의 참정권 획득은.. 그로부터 18년은 지나야 한다. 속 터져서 어떡하냐.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원작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