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로 간 아이들(The Children Gone to Poland, 2018)

배우 추상미가 감독으로서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며칠 전 시네프 채널을 통해 알게 되어 매료되었고(2018년 10월 국내 개봉했다 얼마 전 EIDF 2020에서 재상영), 보지 못한 초반부가 아쉬워서 찾아보니 왓챠에 있길래 한 번 더 보았다. 추상미는 폴란드 국영TV에서 2006년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김귀덕>과 동명의 소설을 접한 뒤, 픽션 영화 제작을 결심한다. <김귀덕>은 대한민국에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6.25전쟁 고아 수천 명의 행방을 알게 했다.

 

감독 추상미는 탈북하여 대한민국에 정착한 청소년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추상미는 그중 '이송'이라는 아이에게 영화 제작을 위한 사전 조사에 동행해 달라고 요청한다. 함께 폴란드로 떠난 이들은 바르샤바와 크라쿠프, 프와코비체, 아우슈비츠 등지를 누비며 전쟁 고아들에 관한 증언을 듣고 폴란드의 슬픈 역사를 마주한다.

 

북한군은 6.25 전쟁이 동안 마주친 고아들을 데려다 러시아로 보냈다. 전쟁통에 고아들을 키울 여력이 없으니, 김일성이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던 러시아에 수천 명의 아이들을 맡아달라 한 것이다. 1951년 러시아로 건너간 아이들은 거의 방치된 채 2년을 보냈고, 1953년에는 그중 일부가 폴란드 프와코비체로 건너가게 된다. 프와코비체에는 마을 전체가 양육원인 곳이 있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아이들은 정신병원이었던 건물에 살게 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끔찍한 전쟁을 겪었던 폴란드 양육원 교사들은, 국가의 정치적 의도와 관계없이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제 자식처럼 정을 주고 먹이고 입히고 가르친다. (고아들의 절반은 지금의 대한민국 땅에서 나고 자랐다.)

 

추상미 감독이 접한 다큐멘터리 <김귀덕>의 '김귀덕'은 이때 폴란드에 건너왔지만 희귀병에 걸려 2년만에 생을 마감한 소녀다. 폴란드인은 소녀를 살리기 위해 헌혈을 망설이지 않았지만 차도가 없었던 모양이다. 소녀의 이야기를 알게 된 폴란드 저널리스트 욜란타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동명의 소설을 완성한다. 폴란드 국영방송사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작업에도 욜란타가 작가로 참여했는데, 뭐가 먼전지는 모르겠다.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조선 전재 고아들인 우리들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파란 인민들의 육친적인 배려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 1959년 7월 30일 국립 중앙 제2학원 조선 전재 고아 일동.

 

아이들은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곧 폴란드어를 익혔다. 당시 교사였던 이들은 아이들이 자주 말하던 한국어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국가 사업을 위해 일손이 필요해지자, 유럽에 보낸 아이들을 모두 데려오라 지시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룹이 나뉘어서 순차적으로 북한으로 이송되었다. '김기덕'이라는 소녀만 빼고 전원이 돌아갔다. 첫 타자로 돌아간 아이들은 폴란드에 편지를 보냈고, 자신들이 어떤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지 토로했다. 조선 땅에 돌아가면 강도 높은 노동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은 아이들은 북한에 돌아가길 원치 않았으나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은 교사의 인솔에 따라 바르샤바에서 마지막 관광을 한 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기차에 올랐다.

 

아이들이 능수능란한 필체로 써 내려간, 폴란드어로 된 편지(곁들여진 한국어 문구 또한 또박또박 정확하다.). 교사들은 7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그 아이들을 하나 하나 기억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아이들에게도 교사들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교사들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양육원 원장이었던 유제프는 '고양국'이라는 아이가 북한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다고, 자신을 다시 프와코비체에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편지를 몇 통이나 받았다. 원장은 타이르는 답장을 여러 번 보냈지만, 결국 어느 순간엔 더 이상 답장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양육원을 곧잘 탈출해 말썽을 부리던 똑똑한 아이 '원둔천'은 북한에서의 고된 삶을 견디지 못하고 탈북했지만, 중국 어느 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알게 되었으니 더욱이 아이들이 품은 폴란드에의 그리움을 달래주기가 곤란했을 것이다. 1961년부터는 더 이상 북한발 편지가 오지 않았다고 한다.

 

폴란드로 간 아이들의 이야기가 그 자체로 너무 강렬해서, 스포를 많이 저질렀다. 영화는 감독이 이 이야기에 홀린 계기부터(엄마가 된 일과 산후우울증), '이송'을 비롯한 탈북 청소년들의 이야기와 양육원 관계자였던 이들의 증언, 당시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과 사진, 폴란드 유적지에서 만난 풍경을 교차로 보여준다. 추상미 감독이 이 모든 이야기를 오로지 자신의 호기심과 의지만으로 영화 스크린에 데리고 온 것은 정말 대단하다. 북한에서는 정치 선동에 써 먹을 요소가 없으니 외면했을 것 같고, 우리나라에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던 전쟁 고아 이야기. 다루기 쉽지 않았을 이야기를 풀어낸 것만으로도 매우 가치 있는 영화다. 당신이 누구든 여운이 오래 남을 것..

 

어쨌든 서양의 문물을 접하고 배운 똑똑한 아이들이 장성해서 어떻게 살아남았을지,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너무 궁금하다. 엔딩 크레딧에는 북한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쓴 편지와 각 아이들의 사진이 등장한다. 모든 편지의 내용까지 알면 좋겠지만.. 폴란드 친구가 옆에 없으니(옛날엔 있었는데..) 알 도리는 없다. 그중 한글이 적힌 부분을 보면 '자강도 강계 기계종합공장 설계부대'에서 일한 듯한 소년도 있고, '조선 함흥시 약학전문학교'에 진학한 듯한 소녀도 있고, '자강도 강계시 의룡동 강계 고등 전기 전문학교 건설 기계과'에 진학한 듯한 소년도 있다. 복한으로 돌아간 모두가 육체노동으로 고생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문화와 역사를 공유했는데, 분단되어 살아야 하는 슬픔과.. 그 간극이 너무나도 깊어진 현실이 참으로 씁쓸하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이러다 당장 통일이 되는 것 아니냐며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는데(평양 냉면도 크게 유행했고) 참 인생무상..

 

너무나도 해맑고 어여쁜 소녀의 미소.

 

우리가 꼭 보아야 할 영화다. 지금 보니 EIDF D-BOX에서 무료로 공개돼 있네. 자막의 가독성이나 화질, 음질이 왓챠보다 훨~~씬 좋다. 왓챠에서말고 여기서 보시길.. 로그인도 필요 없다.

www.eidf.co.kr/dbox/movie/view/621?preview=F

D-BOX | 폴란드로 간 아이들(The Children Gone to Poland)

 

왓챠 링크.

play.watcha.net/watch/m5ZXGB0

폴란드로 간 아이들 - 왓챠

영화의 모티프가 된 다큐멘터리 영상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추상미 감독과 서울대 교수도 유튜브에서 보더라는.. 감사하게도 영어 자막이 있다. 이 영화의 일부 장면이 <폴란드로 간 아이들>에 삽입되었다.

youtu.be/rIy2rITbq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