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Little Women, 2019) #그레타거윅 #시얼샤로넌

한 폭의 명화.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그레타 거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영화. 원작이 두 세기 전에 쓰인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일곱 번이나 영화화됐다는 사실은 놀랍다.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조' 역할에는 시얼샤 로넌, 맏언니 '메그' 역에는 엠마 왓슨, 이웃집 손자 '로리' 역에는 티모시 샬라메가 참여해 캐스팅부터 화려할 수밖에 없다. 시대 초월, 모든 리메이크가 그랬듯이. 게다가 자매들의 엄마 역할은 로라 던, 고모 역할은 메릴 스트립이 맡았다(메릴 스트립이 70대라니.. 여전히 40~50대로밖에 안 보이는데, 미쳤다!).

 

미국에선 작년 크리스마스에, 우리나라에선 올해 2월에 개봉했다. 이후 코로나 19가 창궐하면서 다른 영화들이 순조롭게 개봉하지 못하자.. <작은 아씨들> 대형 광고가 코엑스 메가박스에선 몇 달 동안이나 걸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게 초여름이었는데, 아직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봄까지도 정신이 없어서 보러가지 못한 걸 후회했는데, 드디어 9월 10일, 바로 어제 넷플릭스에서 개봉! 하도 호평이 많았고, 그레타 거윅의 전작 <레이디 버드>가 너무 황홀했던 덕분에 기대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소감은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다.

 

이전까지 제작된 <작은 아씨들> 영화 버전에서는 시점이 과거에서 현재까지 시간순으로 진행되는데,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오간다. 완전하게 자유롭지는 않고 파티 신에서 파티 신으로, 만남 신에서 재회 신으로, 바다 신에서 바다 신으로, 여정 신에서 여정 신으로, 하나 이상의 연결 고리를 주축으로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나란히 놓인다.

 

그레타 거윅의 이유 있는 각색과 변형이 마음에 들고, 영화의 미적인 요소 역시 더할 나위 없다. 그레타 거윅이 연기할 때도 내비치는 산만하지만 통통 튀며 사랑스럽고 그 와중에 중심 만큼은 제대로 서 있는, 그 특유의 분위기가 영화 전반에 깔려 있다. 그러니 영화도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촬영지가 어딘지 장면마다 궁금했고, 나중에 꼭 찾아가리라 결심했다. 특히 로리가 조한테 고백하는 그 언덕! 단풍이 너무 곱게 져서 CG가 아닐까 의심부터 들긴 했지만, 제작 배경은 이따가 다시 찾아보기로. 한 장면씩 소장하고픈 마음이 물씬♥︎

 

이 언덕! 사진이 따로 존재하는 걸 보니 CG는 아닌가 보다!

 

무엇보다도, 2시간 안에 우겨넣기엔 복잡할 수도, 지루할 정도로 길 수 있는 소설을 단막극 특집 같은 느낌 없이, 이렇게 효과적인 방식으로 영화화했다는 사실에 감탄을 할 수밖에 없다.

 

시얼샤 로넌이야 언제나 그랬듯 이 사람 정체가 대체 뭐야 싶게 무척 빛났고, 엠마 왓슨은 아름다웠지만 본래 배우의 존재감보다 역할의 매력이 약하게 느껴저서 아쉬웠고, '베스' 역할을 맡은 일라이자 스캔런은 '베스' 그 자체였다. 자매 모두의 꿈과 내적 갈등이 매우 입체적으로 표현됐다. 더 인간적이고 섬세하게.

 

네 자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막내 '에이미'로 변신한 플로렌스 퓨. 이번 작품을 통해서 처음 보는 배우인데, 낮고 굵직한 목소리와 변화무쌍한 표정 연기가 단연 돋보였다. 나만 아직 안 본 것 같은 <미드소마>와 박찬욱 감독의 <리틀 드러머 걸>에 주연으로 출연했다니, 얼른 챙겨봐야겠다. TV에서 몇 번 해주길래 봤던 1994년작에선 '에이미'가 너무 어려서 도대체 저 어리고 철없는 애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니 무슨 전개야! 하면서 뜨악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 신작에서는 에이미가 다르게 그려진 점이 좋았다. 물론 에이미가 벌이고 겪는 일들은 어린 나이에 걸맞다. (사실 1994년작도 넷플릭스에 있어서 며칠 전에 봤는데, 곧 리뷰를 남기겠다. 원작을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같은 원작을 기반으로, 이렇게 다른 전개를 보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시얼샤 로넌은 미국 뉴욕 태생의 아일랜드 혈통, 엠마 왓슨과 플로렌스 퓨는 영국인, 일라이자 스캔런은 호주인이다. 조금씩 다른 억양을 구사한다. 엠마 왓슨은 어느 장면에선 그냥 대놓고 고향 억양으로 이야기하는데.. 좀 튀었다. 그리고 독일계 교수인 프레드리히 역할에는 프랑스 배우 루이 가렐이 등장해서 희한했다. 독일어 억양으로 말해야 하는데 프랑스어 억양을 숨길 수 없는 그.

 

조와 로리(테디)의 사랑. 이 영화에서 둘은 서로 사랑했을까. 조의 뒤늦은 사랑 고백은 진심인 듯 아닌 듯 애매하게 비춰진다. 작가로서 실패했다는 좌절감, 동생을 잃은 슬픔, 함께 독신으로 살기를 (지 혼자) 꿈꿨지만 결혼해 가정을 꾸린 언니로 인한 외로움 등이 겹쳐.. 누군가에게 열렬히 사랑받았던 기억을 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럼에도 조가 테디를 사랑했다고 믿고 싶게 만든다.

 

그레타 거윅은 전작에서 그랬듯 가족 구성원 사이의 오묘한 애증을 조와 에이미의 관계를 통해 은근슬쩍 다시 드러냈다.

 

로리 역의 티모시는.. 너무 마르고 야위고 어려 보여서 보는 내내 안쓰러웠는데.. 밥 먹여주고 싶다;;

 

후반부에선 주인공 조 마치가 드디어 가장 자신 있는 가족 이야기를 다룬 책을 출간하게 된다. 당당하게 선인세를 요구하고 인세를 올려달라 말하는 태도가 보는 이도 뿌듯하게 만든다. (동시에 교육적이기도 하다. 사람들아, 협상은 이렇게 하는 거다! 네 건 네가 갖고 더 당당해져라! 라고 외치는 듯.) 그리고 책이 출간되는 과정을, 당시의 인쇄 방식을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춘천에 있는 책과인쇄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체험했던, 활자를 하나하나 끼워 맞춰서 잉크를 발라 인쇄하는 방식이 나와 반가웠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책 한 권이 만들어지는 일이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했는지.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로 꼽고 싶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감동. 디지털 시대에는 쉽게 느끼기 힘든 감흥이다.

 

햇살이 따사롭게 들어오는 영상미. 인공 조명으로 만든 건지, 후작업으로 꾸민 건지, 궁금하다.

 

번역에 일일이 '00 언니' '00 오빠' 같은 한국적인 호칭을 넣지 않아서 좋았다.

 

보스턴이랑 뉴욕 꼭 갈 거야. 설마 코로나가 영영 끝나지 않진 않겠지. 여행이 다시 안전해지고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재력을 갖출 때까지 열심히 목숨을 부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