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1999)

1. 어릴 적 이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본 것 같은데 분명 영화의 반도 이해 못했을 테다. 미국 현대인의 허무함 따위를 제대로 꼬집어 표현한 작품이라는, 어디선가 본 누군가의 평론만 기억이 났다.

 

2. 훌륭한 미감. 모든 미장센의 빛과 그림자, 색채, 구도가 하나의 작품 같다. 대단해. 촬영 감독은 콘래드 홀. 샘 멘데스 감독은 처음엔 콘래드 홀이 너무 나이가 많고 연륜이 있어서 그에게 맡기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원하던 촬영 감독이 <아메리칸 뷰티> 대본이 마음에 안 든다고 까서 콘래드 홀이 카메라를 잡게 됐다. 당연하게도 아카데미상 촬영상 수상. 이후에 샘 멘데스 감독과 한 편을 더 작업하고 사망했다.

 

3. 음악 또한 아름답다. 한 편의 영화에 어쩜 이렇게 많은 음악을, 단 한 곡도 장식적이지 않은 형식으로 쏟아넣을 수 있을까. 영화 음악 작곡가는 토마스 뉴먼.

 

American Beauty (Original Motion Picture Score)

 

 

4. 주인공 레스터는 고등학생 딸을 둔 가장. 잡지사 광고 영업팀에서 근무하는데 무능해서 잘리기 직전이다. 아내와 딸의 멸시를 받은 지는 오래. 아내가 고집을 부려 보러 간 딸의 치어리딩, 딸의 친구 안젤라에게 반한다. 안젤라가 제인을 아마도 도발하려고 하는, 자신을 칭찬하고 성적인 무언가를 기대하게 만드는 말을 엿듣고는 자신감을 되찾는다. 마치 다시 태어난 듯 진취적으로 혹은 폭력적으로 행동한다.

 

5. 레스터의 아내 캐롤린은 부동산 중개인인데 실적이 썩 좋지 않다. 남편과의 관계가 어긋난 지는 오래다. 열심히 살았는데 남편에게나 딸에게나 속물 취급만 받는다. 사랑에 목말라 있다. 캐롤린 역시 불륜을 통해 생기를 되찾는다. 불륜 상대가 아저씨인데도 너무 잘생겼다..

 

6. 외동딸 제인은 부모를 혐오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들의 따뜻한 관심이 그립다. 가슴 확대 수술을 하려고 돈을 모으고 있다. 절친 안젤라가 쏟아내는 헛소리에 점점 싫증이 난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리키는 종일 캠코더를 들고 모든 것을 촬영하는데, 심지어 창문 너머 자신의 모습까지 찍는다. 그런데 제인은 리키의 광기와 집착이 싫지가 않다.

 

정신 나간 안젤라..

7. 안젤라는 금발에 전형적인 미인인데 겉으로는 당당하고 쿨한 척해도 속은 그냥 불안한 어린아이다. 자신을 성적으로만 바라보고 다가오거나 추근덕대는 인물이 있어도, 자신이 평범하지 않아 이런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못생겼다는 한 마디 말에 크게 무너지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인정받고자 한다. 안젤라가 가장 연약해진 순간, 허세와 허풍, 동시에 진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8. 리키는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억압적인 지배를 받고 있다. 정신병원에도 갔었다. 용케도 아버지 몰래 마리화나를 거래하며 부를 축적하고 있다. 리키의 변태적인 촬영과 캠코더 화면은 미국 사회의 비정상적이지만 일반적인 광경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창이다.

 

9. 리키의 아버지는 리키의 작은 행보에도 무척 예민하게 구는데, 영화 후반부에 가서는 자신의 아들과 옆집 남자, 레스터의 관계를 의심한다. 충격을 받아 진심으로 울부짖는다. 눈물을 하염없이 쏟고.. 무슬림의 명예살인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리고 감정이 거의 굳어버린 채 불행에 빠진 리키의 어머니.

 

10. 각본가는 TV 쪽에서 주로 활동한 앨런 볼이다. <아메리칸 뷰티> 이후에 영화도 만들긴 했지만 여전히 TV 위주로 활동하는 것 같다. 본래 <아메리칸 뷰티>도 TV 시리즈물로 기획했던 작품이라고.

 

11. <아메리칸 뷰티>는 샘 멘데스 감독의 입봉작이다. 샘 멘드스는 이전에는 주로 연극을 만들었다. 1990년부터는 코벤트가든에 있는 극장, 돈마 웨어하우스의 예술 감독을 지냈다. <아메리칸 뷰티> 이후에는 <로드 투 퍼디션> <레볼루셔너리 로드> <어웨이 위 고> <007 스카이폴> 등을 연출했다. 케이트 윈슬렛과 부부 사이였다.

 

영화 포스터에도 장미꽃으로 뒤덮인 여성의 육체가 등장하지만, 이 장면은 레스터의 상상이다. 포스터 자체가 허상을 드러낸다.

 

12. 어제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하길래, 넷플릭스에도 있길래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봤다.

샘 멘데스 감독의 신작 <1917>이 올해 국내에서도 흥행하고 주목을 받아, 클래시컬한 전작을 방영한 것 같다.

그런데 케이블에서 본 번역은.. 20년 전 버전인 듯, 서양 문화 받아들이기를 영 어색해 하는 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