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에 신이 산다(The Brand New Testament, 2015)

1. 21세기형 희망론.

 

2. 개봉 당시부터 보고 싶었던 작품인데, 이제서야 봤다. 넷플릭스 없이 어떻게 살았나 몰라.

 

3. 한글 제목은 완전히 잘못 지었다. 원제는 <완전히 새로운 성서(Le Tout Nouveau Testament)>라는 의미이고, 이걸 직역했다면 더 이상했겠지만, 영화 속 '신'은 이웃집에 살지 않는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세탁기로 이어진 차원 너머의 세상에 살지. 남신(Dieu, 신의 남성형 명사)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설계한 천국(인간 세계)에 갇혀서 설계 컴퓨터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설마 이 의미에서 한글 제목을 <이웃집에 신이 산다>로 지은 거라면 배급사에서 큰 착오 혹은 영화의 본질에 반하는 과오를 저지른 것. 그럼에도 쫀득한 어감 자체는 포기하기 힘들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4. 지금 이 세상의 부조리함과 불행은 괴팍한 '가부장제'에서 온다. 영화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냥 써 보는 초반부 줄거리:

 

영화 속 신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남성이 신을 연기한다. 지구 어디에나 있을 법한 가정과 똑같은 모습이다. 아버지는 작업실에서 컴퓨터를 두드리며 인간 세상을 설계했고, 늘 어머니와 딸 에아(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신)를 구박한다. 배경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이며 모두 프랑스어를 구사한다. 이 도시에 기린을 풀었다 닭을 풀었다 실패한다. 결국 아담과 이브를 놓고서야 본격적인 인간 세상이 시작된다. 아버지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만큼 세상을 혐오해, 인간 세계에도 갖은 혐오와 불행을 불어넣는다. 에아는 이런 아버지가 한심하고 싫다. 식사 시간에 식탁에 앉지 않으면 윽박을 지르는 데다(어디서 많이 본 모습) 샤워하고 있는데 불쑥 샤워 커튼을 열어제끼질 않나. 그래놓곤 뻔뻔하게 '내가 네 아버진데 뭐 어때'라며 당당하게 외친다. 에아는 고민 끝에 가출하기로 결심한다.

 

에아의 오빠는 지져스 크라이스트, J.C.다. 그 또한 아버지의 독선에 질려 인간 세상으로 내려가 무언가 바꾸려 한 적이 있다. 결과는 지금 우리 모두가 아는 것. 미니 예수상이 되어 에아의 방에 머무는 오빠. 세탁기를 해킹해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탈출하는 방법을 에아에게 알려준다. 사도를 모으는 꿀팁(사도가 되달라 하면 대부분 따라 준다고 한다. 별 것 아닌 기적을 조금 보여주면 된다고도.)까지도. J.C.는 자신은 아이스하키를 좋아해 아이스하키팀 구성원 수인 '12'만큼 사도를 모았지만, 아무래도 엄마가 좋아하는 야구 팀의 구성원 수인 '18'만큼이 있었어야 했던 것 같다며, 에아에게 사도를 더 모아 (구약성서는 이미 있으니) 신약성서를 써 보라고 한다.

 

에아의 작전 1은 아빠를 엿 먹이는 것, 작전 2는 여섯 사도를 더 모아 신약성서를 완성하는 것이다. 맥주를 마시고 뻗어 있는 아빠 몰래 아빠 작업실에 입성한다. 컴퓨터를 조금 구경하다 '열지 마시오'라고 적힌 버튼을 클릭한다. 모든 인간의 출생일시-사망일시 데이터가 들어있다. 에아는 조심스레 과감히 '남은 수명을 모두에게 전송'해 버린다. 서랍 하나를 열어 인물의 인적 사항이 적힌 카드 여섯 장을 챙긴 것도 물론이다.

 

인간계로 건너간 에아는 우선 신약 성서를 대신 써줄 사람을 만난다. 길에서 지내는 노숙자, 중년 남성이다. 자신은 신의 딸인데, 글을 모르니 대신 좀 적어달라고 한다. 설명하면서 천국이 바로 인간 세계이며,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이 그냥 끝이라는 스포일러를 던진다. 그리고 한 명씩 차례대로 찾아가 면담을 나눈다. 다들 남은 수명을 알게 된 후 혼란에 빠져 있다. 각 인물이 등장하는 챕터마다 성경 글귀같은 소제목이 나오는데, 성경을 잘 몰라서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 각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의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바다 옆에서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생각한 게 나 혼자가 아닌가 봐. 

 

과연 에아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영화의 엔딩 스포일러: 

※엔딩 스포일러※

여섯 사도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에아. 마지막 사도는 에아 또래의 남자 아이, 윌리다. 워낙 병약한 탓에 어릴 때부터 엄마가 매일 조금씩 당뇨약을 주입했다. 그 약 때문인지 췌장이 완전히 맛이 가 버렸다. 그래서 살 날이 제일 적게 남았다. 문자를 처음 받았을 때가 '59일'이었다. 에아는 윌리의 마지막 일주일을 함께 보내기로 한다. 마지막 날에는 나머지 다섯 사도와 몇몇 파트너도 함께 모여 윌리의 마지막 순간에 곁에 있어주고자 한다. 죽을 날을 알게 된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 속에서 즐겁게 죽을 수 있도록 마련된 휴양지다. 죽을 사람은 팔뚝에 검은 띠를, 같이 온 사람은 하얀 띠를 둘렀다. 아름다운 바닷가에 둘러앉아 이별을 감당할 준비를 한다.

 

사실 에아의 엄마도 신이다. 'dieu'의 여성형인 'déesse'인데, 영화에서는 '여신'이라 번역된다. (프랑스어에서는 모든 명사가 엄격하게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분류된다.) '여신'이라 불리기에 우리가 학습된 것처럼 웬지 '(남)신'의 부차적인 존재로 느껴지지만, 그냥 똑같은 신이다. (남)신인 남편의 독재와 심술에 기가 눌려 말 한 마디 제대로 해본 지 오래인 에아의 엄마. 에아 방에 있는 그림 <최후의 만찬>에 새로운 사도들이 하나둘씩 생기더니, 마침내 도합 자신이 좋아하는 숫자인 '18'명이 되자 눈누난나 신이 난다. 게다가 싫어하는 남편이 딸을 잡겠다고 인간 세계로 떠나 있는 상태! 자유다! 엄마는 창문을 닦고 청소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집을 가꾼다. 청소기를 들고 남편의 작업실에 들어가 콘센트를 찾는다. 콘센트가 1구라 인간 세계를 통제하고 있는 컴퓨터 전원은 잠시 뽑을 수밖에 없다.ㅋㅋㅋㅋ

 

그 순간 죽기로 돼 있던 윌리.. 아무 변화가 없다. '나 왜 아직 살아 있지?' 전원 공급 차단으로 공기까지 없어지고 있는지, 하늘을 날던 비행기가 중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휴양지 인파를 향해 돌진하던 참이었다. 비행기는 다시 U턴을 해 하늘로 날아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난다. (이 비행기에는 에아를 찾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다 온갖 추태를 부리던 아빠가 타고 있다. 체류증이 없는 괴팍한 노숙자로 분류되어 우즈베키스탄인들과 나란히 이송되는 중..) 엄마가 마침 컴퓨터 전원을 다시 연결하고 컴퓨터 앞에 앉은 참이다. 초기화를 하시겠습니까? 네.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18. 엄마는 자신의 취향대로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다. (여기가 진짜 핵꿀잼ㅋㅋㅋ) 하늘과 바다는 꽃무늬로 물들고, 중력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지구 온난화가 계속되어도 북극은 녹지 않고(이건, 응-아니야 급의 망상ㅜㅜ) 인류에겐 불행보다 행복이 더 많아진다. 여자 대신 남자가 임신을 하고, 여자가 만삭이 된 남자에게 '다리털 이제 안 깎을 거니?'라고 묻자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글쎄'라고 응답한다. 이 부분에서는 넷플릭스에 있는 프랑스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가 생각났다. 이것도 추천작! 노숙자는 신약성서를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에 등극하는데, 신약성서는 빼곡한 글자 대신, 한 장에 그림 한 조각씩 그려져 있다.

 

인류가 행복해진 만큼 엄마도 계속 행복하다. 에아도 행복하다. (윌리랑 사귄다.)

 

5. 영화 속 세계관 설계가 치밀하진 않지만, 가볍고 통쾌한 코미디로 보기엔 무리가 없다.

 

6. 카트린 드뇌브는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까. (여섯 사도 중 한 명인 중년 여성 마르틴.) 화면이 반짝반짝 빛난다.

남은 수명 5년을 선고 받은 마르틴 역할을 맡은 카트린 드뇌브. 아름답다.

 

7. 모든 인간에겐 고유의 음악이 흐른다는 설정, 무척 흥미롭고 좋다. 나의 음악은 얼마나 괴랄한 장르일까..

 

8. 에아의 엄마이자 또 다른 신을 연기한 욜랑드 모로. 정말 어떻게 이런 아우라가 나올까 싶게 신기하고 훌륭한 배우다. 넘 멋져.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세라핀>이었고, 또 보고 싶어졌다.

 

신의 작업실을 청소하러 들어서는 신. 데쓰/여신.

 

9. 이 영화의 메인 포스터가 왜 에아 아빠가 혼자 등장하는 버전인지 모르겠다. 에아 아빠는 화만 내는 심보 고약한 악역인데, 에아가 주인공인데! 마음에 안 들어.

 

10. 마지막 사도인 윌리는 시한선고를 받는다. 얼마 안 남은 살 날 동안 여자가 되기로 한다. 그리고 빨간 드레스를 계속 입고 나온다. 성소수자를 지지한다는 약간의 메시지일까?

마지막 사도 윌리, 그의 이야기를 듣는 에아, 면담 내용을 기록하는 노숙자.

 

11. 모든 인물은 백인이다.. 저기요.. 배경이 브뤼셀이라면서요.. 유럽의 중심지인데.. 예의상이라도 유색인종 좀 넣지 그랬어요? 하는 순간 마지막에.. 동양 여성 1명이 대사 한 마디 없는 단역으로 등장함. 이 부분은 어찌 받아들여야 할꼬.

 

12. 브뤼셀 가고 싶다..ㅜㅜ 브뤼셀 관광지가 배경으로 등장하니 브뤼셀 다녀온 분이라면 조금이나마 추억에 젖을 수 있다☆

 

13. 아무튼 마음이 따뜻해졌다. 오죽 좋았다보다 이렇게나 많이 쓴 걸 보면.

 

14. 거의 5년에 한 번 꼴로 작품 찍는 자코 반 도마엘 감독. 내는 것마다 평이 좋다. 정직한 실력의 소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