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킹 배드(Breaking Bad, 2008~2013)

시즌 1을 보고 나서는 '아 이걸 왜 이제 보기 시작했나?' 싶었고, 시즌 3까지는 흥미진진했다. 시즌 3까지 전개되는 데 드라마 속 시간은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시즌 4부터는 약간 짜증이 나기 시작하더니 시즌 5에서는 열받음. 점점 그냥 빨리 끝내고 싶었음. 진작에 1.5배속으로 볼 걸..하고 후회함... 정주행이었으니까^^;;

 

스포일러 주의.

 

마약 범죄 드라마라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막 시끄럽고 폭력적이고 그럴 줄 알았는데, 대부분 장면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러닝타임에 비해 대사도 별로 많지 않다. 아주 가끔 등장하는, 마약을 만들고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은 감각적이고 흥미로운 뮤직비디오처럼 연출되기도 했지만. 인간의 심리 변화에 굉장히 초점을 둔다. 평범해 보이던 사람의 자아가 이렇게 뒤틀려 있을 때, 온갖 역경을 겪으며 더 큰 욕망을 품고 괴물처럼 변해 가는 과정을 실감 나게 보여주는 심리 드라마에 가깝다.

 

 

마약왕이 된 화학 교사, 월터 화이트. 평범하고 소심하고 돈 없는 아저씨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아들은 16세,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하다. 바가지 긁는 데 도가 튼 아내는 둘째를 임신했고. 그런데 아들의 대학교 등록금, 둘째의 양육비로 남겨줄 돈이 없다. 그래서 이 아저씨는 옛 제자를 찾아간다. 마약 만들어서 팔다가 걸리곤 제 집에서도 쫓겨난 문제아에게 같이 마약을 만들자고 한다.

 

월터 화이트가 솔직히 마약왕이 되진 않음ㅋㅋ. 처음엔 정말 밍밍하고 무미건조한 중년 남성으로 나와서, 아니 이렇게 재미없는 주인공이 있나 싶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드라마 초반부터 어쩔 수 없이 살인을 저지르곤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점점 진정한ㅋㅋㅋ 범죄자로 거듭난다.

 

월터 화이트에겐 아픈 과거사가 있다. 잘 나가는 천재 화학자로 살던 시절, 옛 친구 둘 함께 차린 회사. 어느 날 그 회사를 떠나버리고 교사가 되기로 했다. 그 회사의 기반은 거의 월터가 다진 것인데, 월터 없이 무척 잘 나가는 부자가 된 친구들. (그러니까 왜 떠나;; 그레첸 가족네 집에 머물다가 짐 싸서 아무 말 없이 떠났다는 사실을 비롯해, 월터의 성격을 보면 그냥 자기 여자친구 집이 너무 부자여서 열등감 느껴서 떠난 것이 분명하다.) 워낙 똑똑하기 때문에 자존심도 자부심도 강하지만, 금전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성공한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인지 자격지심도 매우 강하다. 이 자격지심과 오랫동안 묵혀둔 욕망이 <브레이킹 배드> 드라마가 전개되는 데 필요악 같은 요소다.

 

월터의 가족 관계도 오묘하다. 첫눈에 반해 결혼 생활을 17년 가까이 이어오고 있는 아내 스카일러. 열여섯 아들 월터 화이트 주니어는 소아마비로, 목발을 짚고 걸으며 말투가 약간 어눌하다. 아마 아들 치료비로 모든 수입을 다 써서 돈이 하나도 없는 듯.. 스카일러에겐 여동생 마리가 있는데 그 남편 행크는 마약 단속국(DEA) 소속 경찰이다. 내성적인 월터와 달리 다들 시끌벅적한데, 가족모임을 할 때마다 그런 성격 차이가 월터의 신경을 박박 긁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게다가 아들 주니어는 자신보다는 이모부인 행크와 더 친하게 지낸다. 아들은 점점 아빠와 똑같은 이름 '월터 화이트' 대신 새로운 이름인 플린으로 불리길 원하는데, 월터가 이걸 달가워할 리가.. 자기 존재를 부정받는 느낌에다 자격지심이 엄청나겠지. 자아가 너무 비대해서 자아가 너무 쬐끄만하고 사람이 찌질하다..

 

시즌 1에서는 시작부터 죽을 고비가 여러 번 온다. 월터는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르곤 엄청나게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을 병신같이 아내를 강간하면서 풀려고 한다. 개 역겨움. 생각보다 마약왕이 되는 쿨내 나는 전개는 아니어서, 아니 대체 무슨 이 사람이 마약왕이 된다는 거야 싶다..

 

 

 

월터 화이트가 마약을 만들기로 결심한 뒤, 동업을 제안하러 찾아간 사람은 옛 제자인 제시 핑크맨. 고등학교 때부터 마약을 만들어서 팔고 본인도 중독되고 엉망진창으로 산 덕에 부모님에겐 손절당했다. 말기 암 투병을 하던 숙모를 도와준 덕분에 숙모가 자신에게 유산으로 남겨준 집에 혼자 살고 있다.

 

제시 핑크맨은 머리는 나쁘지만 마음은 무척 따뜻하고 착한데 약을 하든 안 하든 감정도 너무 격정적이고 사고뭉치다. 처음엔 제시의 정신 없음이 매우 비호감이었는데 가면 갈수록 제일 정이 간다. 정말 착하고 불쌍하다. 월터에게 멍청하다고 욕 먹고 여러모로 이용당하면서도 월터에 대한 의리는 절대 저버리지 않는다.

 

제시가 더 좋아서 제시 이야기를 더 많이 쓰고 싶은데 제시에 대해서 딱히 쓸 말이 별로 없네.. 단순한 성격만큼 단순한 삶을 살아온 제시.. 안 그래도 점점 불쌍해져서 미칠 것 같았는데, 시즌5 마지막에선 마약 제조 노예가 되어서 우리 안에 갇혀서 이상한 죽 같은 음식만 먹고 온갖 학대를 당한다. 그 삐쩍 마른 몸으로 질질 끌려가는 모습...ㅜㅜ

 

 

 

솔직히 둘의 관계가 극도의 애"증"을 넘나들고 어떤 고난이 와도 끝내 서로에 대한 집착인지 애정인지를 저버리지 않는 걸 보면 월터 화이트와 제시 핑크맨의 브로맨스물이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 월터 화이트의 성격상, 제시 핑크맨은 진작 버렸을 카드인데 지켜주려고 정말 애를 쓴다. 처음 대규모 마약 조직단에 스카웃 제의를 받았을 때, 함께 일할 똑똑한 화학자가 있었는데도 뭐가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신을 동경하는 화학자를 아웃시키고 막무가내인 제시를 들인다. 그것도 수익을 5:5로 나누기까지 하면서. 그땐 궁시렁거리긴 해도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잘하는 제시같은 인물이 필요했을 테니 납득이 갔는데. 그 집착이 쌓여서 정이 된 건지, 정이 쌓여서 집착이 된 건지 총체적으로 이상해짐..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비틀어지고 어긋나는 게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묘미다.

 

 

 

거스. 구스타보 프링. 와. 처음 등장하자마자 미친 존재감 발휘. 원래 이렇게까지 중요한 역할은 아니었는데 배우가 워낙 매력적이어서 멕시코 마약계의 오리지널 갱스터를 제치고 거스가 주요 마약왕이 되었다고 한다. 인정 인정.. 인정할 수밖에 없다. 죽음이 가장 아쉬운 인물.. 매우 선하고 친절한 인상이지만, 치밀하게 계산적이고 때로는 극악무도해지는 훌륭한 사업가다. 실제로 주변에 이런 인물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성심을 다해 존경하고 싶다.. 이름도 어떻게 '프링'이야. 이 캐릭터랑 너무 어울리잖아..

 

 

거스의 오른팔로서 보안을 담당하는 전직 경찰관 마이크. <반지의 제왕> 엘프 아냐? 귀 모양이 정말 엘프다 엘프. 처음엔 그냥 지나가는 캐릭터인가 했는데, 점점 비중이 커진다. 역시나 배우부터가 매력적이다. 평소엔 손녀를 돌보며 일상을 보내고, 보안이나 폭력 관련 일이 생기면 보스로 나선다. 죽음이 두 번째로 아쉬웠던 인물..

 

 

또 다른 존재감 천재. 사울 굿맨. 실제 발음은 그냥 솔~이다. 프리퀄 시리즈 <베터 콜 사울>의 주인공. 주인공이 고지식하고 답답하고 쪼잔한 캐릭터인데, 사울은 그 정반대에 있는 수완 좋고 말솜씨 좋은 범죄 전담 변호사다. 봐도 봐도 신기한 배우다..

 

 

 

부창부수. 월터의 사랑, 스카일러. 왜 부창부수냐면 월터만큼이나 짜증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바가지 장난 아니게 긁는다. 그냥 잔소리 많은 아내이자 엄마까진 참을 만한데, 한 가정을 꾸린다는 건 그렇게 마이크로 매니저가 된다는 거니까.. 월터의 마약 제조 사실을 눈치 채고 단칼에 결별을 마음 먹고는 직장 상사 테드와 바람을 필 때는 짜증이 났다. 마약 만드는 남편은 평생 보지 말아야 하면서, 탈세 일삼는 허세 잔뜩 든 부잣집 아들내미랑 사귀는 건 괜찮아?ㅋㅋㅋ 돈 처바른 테드네 집에 드나들면서 점점 '부'에 관한 욕망에 눈을 뜬다. 욕실에 깔린 온돌 바닥을 즐기며 감탄을 하면서 욕망에 젖어들었다가 욕망을 차단하기 위해 수건을 꺼내 바닥에 까는 그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지.

 

하지만 결국 자신도 돈이 좋다는 사실을 인정했는지, 월터에게 동업자로서의 부부 생활을 제안한다. 특히 '탈세'를 함께하기로. 회계 일을 했었기 때문에 엄청난 자신감을 내뿜는데. 그놈의 세차장(월터는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 교사 일을 하면서 투잡으로 세차장에서 알바를 한다. 거기서 일하다가 말 드럽게 안 듣는 제자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굴욕을 얻기도 했다.)을 인수해야 한다며 우기고 또 우기고. 갑자기 모든 권력을 다 쥔 듯 기고만장하게 구는 게 정말 싫었다. 얼마 전까지 그 돈 더럽다고 할 땐 언제고 지가 번 돈마냥;;

 

나중에는 테드가 탈세로 걸려 회계 장부를 담당해던 자기까지 국세청 조사를 받게 생기자 테드가 어떻게든 과징금 70억 원을 내도록 유도하는데. 테드가 좀처럼 죄 값을 치르려 하지 않는다. 아니 양심 없는 놈인 거 왜 진작에 알아채지를 못했어.. 크레이지 스카일러.. 결국 월터 몰래 사울 변호사와 작전을 짜곤 테드에게 70억 원을 보낸다. 테드는 갑자기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친척 할머니가 남긴 유산이 수중에 들어오자, 최신 자동차부터 새로 뽑고 폐업한 회사를 다시 세우려고 하는데? 여러모로 정말 스카일러의 행동이 미쳤어..

 

그 사이에 월터는 우여곡절 끝에 이제 마약 제조에는 손 떼려고 했는데, 스카일러가 전 재산을 웬 놈한테 갖다바치는 바람에 다시 마약 제조에 뛰어들 수밖에 없게 된다.. 작가는.. 인생의 좆같은 아이러니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아무튼 내로남불 스카일러 극혐... 물론 자아 비만 월터는 더 극혐..

 

아 시즌 2 중반부에서 월터의 암 전문의가 스카일러한테 "애기가 나오긴 하는 건가요?"라고 물을 때 웃겼다. ㅋㅋㅋ 시즌 1부터 시즌 2 까지 대부분 계속 만삭 상태야..ㅋㅋ 분명 몇 주 뒤면 출산이랬는데.. 정주행하면서 며칠 만에 보는 나도 이렇게 답답한데 이걸 2년에 걸쳐 당시 본방 챙겨 본 사람들은 오죽했을까.

 

 

 

 

스카일러의 동생 마리도 짜증나는 캐릭터다. 보라색에 미친 여자.. 남편 행크도 짜증나는 캐릭터다.. 월터가 행크 볼 때마다 스트레스받는 이유 충분함.. 호불호를 떠나서, 나중에 행크가 오리지널 갱스터의 조카, 쌍둥이 킬러와 싸우다 불구 신세가 됐을 때, 둘의 미묘한 심리 변화가 너무 사실적이고 현실적이어서 놀라웠다.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힘을 실어주는 마리와 마리의 그 행동이 지겹고 짜증 나기만 하는 행크. 이 드라마.. 사람 심리를 너무 잘 안다. 현생에서 엄청 데이며 살아온 듯..

 

 

 

거의 후반부에 등장하긴 하지만, 언급 안 할 수 없는 주요 인물 토드. 토드가 얼마 전 알게 된 배우 제시 플레먼스였다니.. 처음엔 날씬한 모습으로 나와서 몰라봤다. 새하얀 피부와 완벽한 금발이 뭔가 비호감이었음^^;; 그래도 마약 제조의 핵심 역할을 하는 리디아에게 반해서 엄청 들이대는 모습은 꽤 순수해 보였다. 기차에서 마약의 주요 원료를 훔치다가, 자신들을 목격한 남자아이를 테드가 상의도 없이 그냥 쏘아 죽이는데 연민 많고 정 많은 제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조직을 떠나기로 한다. 테드는 그 와중에 자신에게 감옥에 연줄이 있다며 허세를 부리는데, 그게 사실이었고 그 연줄인 삼촌이 이후에 또 무자비한 조직 보스로 자리매김한다. 테드는 한동안 월터 화이트에게 있어서 제시 핑크맨의 대체재 역할을 하다가, 삼촌과 함께 월터의 재산을 다 털어버리곤 월터는 살려주고 제시를 납치 감금해서 순도 높은 마약 제조에 부려 먹는 나쁜놈이 된다. 선해 보이는 인상 덕분에 볼 때마다 반전 매력이 느껴지는 배우다.

 

 

 

토드의 짝사랑, 리디아. 마약 제조 일에 어떻게 가담했나 싶게, 시종일관 불안하고 감정적인 캐릭터로 나온다. 이쯤 되면 알 수 있다. <브레이킹 배드> 제작진, 아니 빈스 길리건이 그리는 여성 캐릭터가 매우 편견에 치우쳐 있고 천편일률적이라는 것을... 스카일러-마리-리디아. 안 그래도 몇 안 되는 여성 캐릭터들이 상황만 달랐지 너무 비슷한 거 아니냐고. 감정적으로 굴다가 갑자기 권위에 차서 이것저것 주도하더니 다시 감정에 휩싸여 무너지는 패턴. <종이의 집>에 나오는 여성 캐릭터들과도 결이 같지.. 좀 창의적이 돼 봐, 아니면 관찰을 더 하던가, 문학이라도 파 보던가..!!

 

제시의 여자친구 둘과 조력자 웬디도 언급하고 싶지만.. 캐릭터를 따지기엔 너무 분량이 적다..^^;;

 

 

 

월터는 시즌 5 말미에서 신분 세탁을 한 뒤 오지의 오두막집에 혼자 지낸다. 유일한 낙은 신분 세탁 도우미의 방문. 돈을 얼마 줄 테니 두세 시간만 더 있다가 가라고 애원하는 걸 보면 안쓰럽긴 하다.. 그러다 아내도 아들도 아직 신생아인 딸도 평생 자신을 미워하며 마약 범죄자의 가족으로 편견 속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는지.. 결국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사실 월터를 꼭지 돌게 한 건 옛 여친과 친구 그레첸 부부의 방송 인터뷰다. 회사 기반을 다진 월터의 공을 싹 지우는 태도에 빡쳐선 두 부부를 먼저 찾아간다.. 자신의 가족에게 자신이 번 돈을 장학금 명목으로 지불하라는 협박을 마치곤.. 스카일러를 찾아가 지금까지 자기가 가족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아니었다고,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한 거였단 진실을 인정한다. 

 

그날 밤, 행크를 죽이고 자신의 전재산을 몰수한 조직을 찾아가 기관총으로 전원을 몰살시키곤 제시를 살린다. 그리고 자신은 아주 영예로운 듯 시체 더미 사이에서 웃으며 죽는다. 끝까지 비대한 자아를 드러내며 자아 도취에 젖은 월터란 남자. 최고의 결말은 무슨 얼어죽을. 월터의 자살성 죽음은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죽음 중에서 정말 역겨웠다^^

 

 

 

다른 마약 드라마 <남부의 여왕>은 주인공이 도저히 여왕이 될 기미를 안 보여서 보다가 말았고.. <나르코스>는 지나치게 남성 중심의 서사여서 (대부분 여자들은 성 노리개로 이용만 당함!!) 피곤해서 보다가 말았다.. 뭐 콜롬비아라는 남미 국가의 역사를 다루는 드라마고 남미 문화가 워낙 그러니까 이해한다고 쳐도 말이야..^^;; 아무튼 둘 다 다시 챙겨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