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저는 픽했습니다(だから私は推しました, 2019)

일본의 지하 아이돌 세계와 그들을 지지하는 오타쿠를 다룬 NHK 8부작 드라마. 생각보다 순수하고 현실적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는 사람들 이야기. 누군가를 파는 덕후라면 이 드라마에 심히 공감할 것 같다.

 

삶보다 SNS에 더 진심인 평범한 직장인 '아이'가 실연을 당한다. 포르투갈로 발령이 난 남자친구가 청혼해 포르투갈로 함께 떠나기만을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말이다. 남자친구는 아이가 자신을 SNS 과시의 도구로 쓰는 것도 싫고 포르투갈에서 같이 지내려면 수준이 높아야 하는데 넌 창피하다는 이유로 뒤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망연자실한 아이는 얼마 후 스마트폰을 잃어버리고 스마트폰을 주워준 사람을 찾아간다. 그곳은 지하 아이돌의 공연장이다.

 

공연장에서는 5명으로 이뤄진 걸그룹 '서니 사이드 업'이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다. 그중 유독 실수가 잦고 모든 것이 서툴러 보이는 멤버 '하나'가 아이의 눈에 띈다. 아이는 즉각적으로 동족의식을 느끼고 열등감이 폭발한다. 공연 도중인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으며 악담을 내뱉는다. 그러고는 폰도 안 찾고 줄행랑..

 

본인도 그 일이 창피했는지, 반성을 하다가 다시 라이브 공연을 찾는다. 이번에는 사과를 하러 왔다. 다른 오타쿠처럼 원하는 멤버와 사진을 같이 찍을 수 있는 쿠폰을 한 장 사들고는. 아이는 앞으로 하나를 열심히 응원하겠다고 결심한다. 아이는 남자뿐인 다른 오타쿠들과 뒷풀이를 하면서 조금씩 이 세계에 빠져든다.

 

누가 봐도 제대로 입덕했는데, 본인은 '오타쿠'가 아니며 그냥 '팬'이라고 우긴다. 반면, 아이가 쓰는 돈은 점점 커져간다. 그런데 장애물이 하나 있다. 하나의 다른 오타쿠이자 오타쿠 회장이다. 그는 수십 장씩 쿠폰을 사서 하나를 독점하듯 만나고, 새로 등장한 아이를 경계한다. 안 그래도 하나에게 집착을 심하게 하는 터라, 하나는 무섭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 아이는 우연한 계기로 그 남자의 비리를 알게 되고, 다른 변호사 오타쿠의 도움으로 그 남자를 팬클럽에서 퇴출시킨다.

 

행복한 덕질을 이어가는 나날들. 하루는 주말 야외 공연에 갔다가, 회사 친구를 만난다. 덕밍아웃을 결심했지만, 아무리 해도 용기가 나지 않아 주저하는 아이. 친구들이 지하 아이돌의 형편 없는 실력이나 시스템을 욕하는 걸 듯고는 자신이 오타쿠임을 고백한다. 친구들뿐 아니라 야외에 있는 익명의 대중 앞에서 당당하게 응원 티셔츠를 입고 공연을 즐기게 된다.

 

그나저나 하나에겐 거의 유일한 팬이자 가장 큰 돈을 쏟아 붓던 그 변태남이 사라지자, 수익이 크게 줄어든다.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쓰리잡을 뛰며 무리를 하더니 무대 위에서 쓰러진다. 아이는 하나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불법 채팅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미친;; 가서 등짝 백 번 때려주고 싶다. 거의 자기가 낳은 애를 키운다고 생각하나 보다. 거대한 다마고치 게임. 이건 좀 아니지.. 그것도 성적인 채팅 아르바이트라니;; 일본 놈들;;;; 남자친구한테 그렇게 진심을 다했어 봐라.. 걔가 그렇게 도망 갔겠냐고.

 

하나는 아르바이트 사실을 친구에게 들키고, 덕질도 아르바이트도 모두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하나가 친구의 조언을 받아들이려고 하니, 또 새로운 위기가 찾아온다. 하나의 과거사가 까발려진 것. 아이는 하나가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자신이 정말 친구가 아닌 물주였다는 생각에 좌절한다. 이후 이야기는 거의 엔딩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생략.

 

사실 이 드라마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상해 혹은 살해 사건. 처음부터 아이가 취조실에서 형사에게 넋두리 포함,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으로 드라마가 시작된다. 실제 사건의 조사 현황은 중반부에서 드러난다.

 

 

이 드라마는 우연히 지하 아이돌 세계에 빠져든 여성을 통해 지하 아이돌의 부조리함, 아이돌의 수익 구조, 스토킹 같은 문제, 그럼에도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환희 같은 걸 두루 보여준다. 또, 이 드라마는 주인공이 별 일을 다 겪는 성장담이다. 지하 아이돌에게 빠져 온갖 현질을 하고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다가, 결국엔 자기 자신을 돌보고 사랑할 줄 알게 된다는 이야기. 직장인의 자아 찾기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퇴사인 법.. 아이도 퇴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