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복도 많지(LUCKY CHAN-SIL, 2020)

길을 잘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막다른 벽이 나타난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이 땅의 모든 방황자를 위로하는 영화다. 찬실이(강말금)는 사실 굉장히 불운한 상황에 처해 있다. 역설적인 제목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시처럼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듯이' 찬실이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참 복도 많은 사람이다. 나이 마흔, 지금까지 싱글로 지냈지만, 유명한 예술 영화 감독 밑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며 좋아하는 영화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별 불만 없이 지내왔다. 그런데 그 감독이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본인 대사에 따르면 프로듀서로서는 쫄딱 망했다. 언덕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나오는 동네, 할머니(윤여정)가 집주인인 집에 세들어 살게 된다. 친한 배우 동생인 소피(윤승아)는 찬실을 가엾게 여겨 그를 가정부로 고용한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앞으로 영화 일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마음이 복잡하다. 영화 인생의 존경스러운 빛과 희망이던 지 감독이 갑자기 사라졌으니, 애도도 한몫 했겠지. 알고 지내던 제작사 대표(최화정)를 만나 도움을 청하지만, 예술 세계가 뚜렷한 지 감독하고만 일해왔으니 PD로서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겠냐며 정신 차리라는 모욕만 듣고 돌아온다.

 

 

스포일러. 영화의 홍보 수단으로 등장한 두 개의 러브라인은 허상이다. 소피의 불어 선생이자 단편 영화 감독인 김영(배유람)은 찬실이 연애 감정을 핑계로 현실에서 도피하려는 마음을 반영하는 캐릭터다. 찬실은 영화 취향도 가치관도 너무 다른 김영을 비웃으면서도 그에게 위로받고 싶어한다. 외로우니까. 한겨울에 느닷없이 난닝구에 빤스 바람으로 나타난 장국영(김영민)은 귀신도 아니고 찬실의 영화를 향한 꿈과 열정이다. 마음을 못 잡는 찬실 앞에 계속 나타나 영화에 대한 열정을 상기시킨다. 찬실은 정말 슬프고 불쌍하다.

 

집주인 할머니는 처음엔 수상한 듯 묘사되지만, 주민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는 평범한 사람이다. 찬실은 할머니의 한글 공부를 도와주고, 보양식도 얻어 먹으며 할머니와 친해진다. 할머니가 받침을 빠트리거나 자음을 바꿔가며 쓴 문장을 보고 찬실은 울음을 터트렸다. 또 영화를 (참 좋아)했다는 찬실의 말에, 할머니는 일절 출입을 금했던 방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챙기라 한다. 집주인 할머니는 딸을 잃은 슬픔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버틴 세월이 얼마나 오래됐는지, 할머니의 딸이 남긴 물건은 모두 옛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잘 관리했는지 수많은 영화 테이프와 책이 먼지 하나 없이 잘 간직돼 있다. 그 와중에 소피는 자신의 연기를 발연기라 칭한 네티즌의 악플을 보고 속상해 하는데, 찬실은 (징징대지 말고) 똑바로 생각해 보라며 딱 잘라 말한다. 두 번이나. 이건 소피를 향한 대사가 아닌, 본인에게 하는 말 같다. 그런데 소피 진짜 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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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영화인데도 캐스팅이 화려한 것은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쓰고 연출한 김초희 감독이 오랫동안 홍상수 감독의 PD로 일했기 때문이란다. 전작인 <산나물 처녀>의 출연진도 홍 감독의 배우진과 많이 겹친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이미 질릴 대로 질려버린 홍 감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어서 좋았다. 홍 감독이 허황된 인간의 마음을 좇는다면, 김초희 감독은 인간의 진실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좇는다. 전자는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인간의 하찮은 고민이고, 후자는 배고픈 인간의 진짜 마음이다.

 

찬실과 할머니, 소피의 모습에 조용하고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김초희 감독은 실제로 5년 전에 PD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 영화는 어느 정도 자전적인 이야기겠지. 그래서 날카로울 만큼 솔직했구나. 역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음악도 좋았다. 예고편에 나오는 음악이 엔딩 크레딧에서도 흘러나온다.

 

한 번 더 봐야지. <집시의 시간>이랑 <동경이야기> <베를린 천사의 시>도 챙겨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