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밤(One Spring Night, 2019)

결정이 느린 여성 캐릭터들 덕분에 속이 매우 답답했던 드라마. 안판선 감독-김은 각본가의 전작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는 그래도 두 주인공의 사랑이 일찍 시작되었고 매회 설렘 포인트가 여럿 포함되었는데, <봄밤>은 전개도 느리고 캐릭터도 더 보수적이다. 전작만큼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여기에 있지 않을까.

 

 

스포일러일지도.

큰 언니는 이혼을 앞둔 가정폭력 피해자. 부부 간 성폭행이 인정될 수도 있다는 암시만 날리곤, 남편을 응징하는 사이다는 없었다. 이 문제를 짚은 건 드라마로선 최초이려나. 하지만 메시지 전달력이 너무 은은해. 콩밥 아니면 개똥이라도 먹였어야지.

 

둘째인 주인공 '정인'(한지민)은 갑갑한 남자친구로부터 얼른 벗어나지도 못하고, 제대로 불만을 얘기하지도 않고, 시간만 질질 끌다 결국 양다리를 걸치고 만다. <봄밤>에 나오는 전 남자친구와의 갈등 구조는 전작이랑 비슷한데, 보여주는 방식과 속도, 분량은 너무나도 다르다. 고것을 질질 끄는데 그 속도나 방식이 매우 지나친 느낌.

 

막내는 프랑스에 살다가 스토커 혐의를 받은 직후 유학생활을 급하게 종결하고 부모님 몰래 귀국했다. (프랑스 유학 도중 돌연 귀국한 것은 배우의 현실 배경과 같다.) 이 드라마에서 언니들의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맡았다. 잘 들이대는 기질을 발휘해 공무원 시험 준비생과 만난다. 셋 중에 연애사 자체는 가장 멀쩡한데 드라마 속에서 숨통 트이는 포지션은 아니다. 조금 소모적이라는 느낌.. 배우를 좋아하니 더 아쉬움.

 

순수해 보이지만 상처 많은 미혼부 약사(정해인)가 또 다른 주인공이자 '정인'의 새로운 짝. 이유조차 듣지 못한 채 약대생 시절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았고,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함께 미래를 꾸려나가는 중에 또 버림받았다. 딱히 개연성이 느껴지지 않는 허술한 과거사 설정이었지만.. 여려 보이는 외모가 그 성격과 어울렸다.

 

정인의 전 남자친구 '기석'. 마음이 식어버린 (그렇다고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전 여자친구를 되찾으려는 집착도 결국은 자신의 자존심, 후배에 대한 열등감을 위해서다. 이런 점이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여자 주인공의 전 남친과 설정이 똑같다. 그만큼이나 아무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니 배우 김준한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인물을 비출 때마다 시간 낭비라 느꼈다.

 

'기석'의 아버지(김창완)는 그 이상으로 영악하고 괴물 같은 인간. 악역이니 보기가 힘들지. 후반부로 갈수록 자신의 그릇된 행동을 반성하고 아들이 자신을 닮지 않기를 바라긴 한다. 근데 김창완 님, 음악인으로서는 진짜 팬인데 배우로서의 연기는 너무.... 실력보단 존재감 때문에 캐스팅되시는 듯..

 

'정인'의 아버지(송승환)는 '기석'의 아버지가 이사장으로 있는 재단에 속한 고등학교(?) 교장이다. 완전한 속물로, 딸들의 고난을 창조해 내는 인물. 보기 정말 괴롭다. <봄밤>에서는 배우 길혜연이 마음도 넓고 속물도 아닌 '엄마' 역할을 맡았다. 바로 직전에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봐서 그런지 꽤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큰 언니의 남편은 배우 이무생이 연기했는데, 정말 간사하고 치사한 인간 쓰레기 캐릭터. <부부의 세계>에 나온 다정한 정신과 의사 캐릭터와는 정반대. 정말 딴 사람 같아서, 같은 배우라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대한민국 사회가 아직 얼마나 보수적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 현실적인 고민을 고정관념에 머무르는 관점에서 그리는 드라마보다는, 우리 사회 주류에는 조금 색다르게 느껴지는 일들이라도 그냥 뻔뻔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여기는 실험적인 드라마가 나왔으면 좋겠다. 전자보단 후자가 사회적 인식을 재고시키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겠어? 언제까지 미드에 의존하며 대충 떼울 거야.. 우리나라에도 재혼 가정이 얼마나 많은데 아직도 그런 경우가 미국이나 프랑스에나 있을 법한 이야기인 것처럼 취급하는 건 제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