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벨에포크(La belle époque)

 

제작연도 2019년

러닝타임 1시간 55분

감독 니콜라 베도

주연 다니엘 오떼유, 기욤 까네, 도리아 틸리어, 화니 아르당

 

관람일 2020년 6월 5일

장소 메가박스

 

 

프랑스 영화는 어딘가 뻔뻔한 매력이 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로맨틱하게 부풀려 포장하는 데서 나오는 뻔뻔한 매력.

 

청소년 시절 유난히 좋아했던 <러브 미 이프 유 데어>가 그랬고, <아멜리에>라던가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 <무드 인디고>가 그렇다. <카페 벨에포크>도 이들처럼 상상력 넘치고 대담한 영화다. 호시절을 의미하는 '라 벨 에포크(La Belle Epoque)'가 원제다.

 

 

<카페 벨에포크>의 주인공은 절필한 만화가, '빅토르'. 한때 신문에 만화를 연재했다. 무명 작가인 데다, 신문이 인쇄 사업은 접고 온라인으로 전향한 뒤엔 만화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와이프 '마리안'은 잘 나가는 정신과 의사에 하나뿐인 아들 '막심' 역시 이름을 날리는 영화 제작자이자 사업가다. 새로운 것도 싫어요, 변화도 싫은 빅토르는 신기술에 환장하는 모자와는 영 딴판이다. 아내와 아들의 무시를 받은 지는 절필한 세월만큼 오래됐다. 영화의 도입부에서도 모임에서 겉도는 빅토르를 두 모자가 한껏 비웃는다. 저 불쌍한 노인네가 언제 목숨을 끊어도 이상할 게 없겠다 싶을 정도. 막심은 파티가 끝나고 아버지에게 초대장을 건넨다.

 

마리안은 만화도 그리지 않고 돈도 벌지 않으며 무기력에 빠진 빅토르가 마냥 답답하다. 마리안은 빅토르를 맹비난하며 당장 집밖을 나가라고 한다. 사실 마리안은 빅토르를 해고한 신문사 편집국장과 불륜에 빠져 있다. 빅토르와의 관계를 끝내겠다 결심하고 갈 곳 없는 남편을 매정하게 쫓아냈지만, 쾅 닫은 문 뒤에 주저앉아 나쁜 년이라고 자책한다. 불륜 사실을 전혀 모르는 빅토르는 문제의 편집국장을 찾아가 불륜용 원룸을 당분간 쓰게 해달라 한다. 그리고 아들에게서 받은 초대장에 응하기로 한다.

 

막심의 친구 '앙투안'은 시간 여행을 설계하는 이벤트 기획자다. 연극(또는 영화) 제작에 큰 뜻을 품었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대신 시간 여행 사업으로 초대박을 쳤다. 손님이 떠나고픈 시대를 정하면, 정교한 세트장을 지어 배우들에게 당시 사람들의 언행을 모사하도록 지시하고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손님들은 거액을 지불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만찬, 헤밍웨이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 마시기 등 꿈 같은 상황 속으로 들어가 완벽한 시간 여행을 떠난다. 막심이 아버지에게 건넨 선물은 이곳에서 시간 여행을 떠나 보는 이용권이다.

 

앙투안은 사실 어린 시절 막심의 집에 놀러 가고, 막심과 가족 동반 여행을 함께 떠나면서 친구 아버지인 빅토르에게 푹 빠졌다. 멋진 스토리를 만화로 그려내는 빅토르를 보며 작가가 되길 꿈꿨고, 늘 싸우는 자신의 부모와는 달리 다정함과 열정이 넘치는 빅토르와 마리안의 사랑을 동경했다. 친구 막심의 부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막심보다 더 진심으로, 빅토르가 다시 만화를 그리기를, 다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빅토르가 떠나고 싶은 순간은 1974년 5월 16일, 장소는 리옹의 어느 카페 '라 벨 에포크'다. 아내에게 쫓겨날 때 계단에 쏟은 만화의 실제 현장. 아내를 만나기 전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걸까, 착각에 빠진 순간, 빅토르가 그리던 여인은 지금의 아내인 마리안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을 처음 만난 순간, 권태에 빠지기 전 열렬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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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단조롭지 않다. 빅토르와 마리안의 사랑 이야기에, 이 모든 연극의 기획자인 앙투안과 어린 시절 마리안 역할을 맡은 배우 '마르고'의 사랑 이야기를 교차해 보여준다. 앙투안은 어린 시절 부모가 항상 다툰 탓인지, 분노 조절 장애를 앓고 있다. 소품 하나라도 못마땅하거나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일 듯이 달려든다. 그게 아무리 사랑하는 마르고여도 말이다. 마르고의 상처는 앙투안을 사랑하는 만큼 배로 깊어진다. 결국 마르고는 앙투안을 떠나 초라한 연극 무대에 선다. 앙투안은 좋아하는 아저씨가 주인공인 완벽한 연극을 위해 마르고를 찾아가 돌아와 달라고 애원한다. 마르고는 다시 세트장에 복귀하지만, 다혈질인 둘의 관계는 위태위태하다.

 

빅토르와 마리안의 사랑은 참으로 로맨틱했다. 수줍고 소심했던 빅토르와 저돌적이고 당찬 마리안은 서로에게 반했고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그 시절의 첫 만남을 다시 마주한 빅토르는 모든 것이 거짓임에도 상황극에 푹 빠진다. 아들의 영화사에 찾아가 애니메이션 계약을 하고 아들에게 수표를 받아온다. 만남의 둘째날, 셋째날을 연이어 경험하고 싶으니까. 파티가 열린 날, 빅토르와 마르고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눈빛을 교환한다. 마르고는 앙투안의 질투를 유발하기 위해서인지 충동이 일어서인지 규칙에는 어긋난 스킨십을 한다. 빅토르에게 입맞춤을 한 것. 화가 난 앙투안은 당장 모든 연기를 중단하라 외치고는 침실로 달려간다. 이미 세트장을 떠난 빅토르와 마르고는 다른 시대가 재현되는 세트장을 찾아 일탈을 삼는다. 그리고 종착지는 배우 전용 숙소. 마르고는 배역인 '마리안'으로서가 아닌 마르고로서 자신을 소개한다. 둘의 행방을 찾지 못한 앙투안은 빅토르의 숙소로 향한다. 앙투안은 빅토르가 마르고를 그린 그림을 한 장씩 넘겨본다. 새벽녘 빅토르는 숙소로 돌아와, 추억 속 마리안이 아닌 마르고라는 인물과 사랑에 빠지는 환상에 젖는다.

 

반면 현대에 실존하는 마리안은 불륜남과의 본격 동거에 들어가지만 점점 허탈감을 느낀다. 자신의 상담실과 불륜남의 불륜 전용 원룸에서 벗어나 보니, 그의 모든 행동이 지겹고 미워 보인다. 한때 정신적인 사랑을 나눴던 빅토르가 그리워진다.

 

앙투안과 막심이 바란 것은 둘의 재회다. 빅토르가 마리안보다 마르고에게 더 이끌린단 사실을 눈치 챈 앙투안은 수를 쓴다. 그다음 만남에서 마리안 역할의 배우를 교체하는 것이다. 낯선 배우의 모습에 실망한 빅토르는 세트장을 박차고 나가, 마르고를 찾아 헤맨다. 다른 배우는 마르고의 집 주소를 알려주고, 빅토르는 그곳을 찾아간다. 마르고는 딸아이가 있는 유부녀다. 엄마는 철부지 극성에, 남편은 다정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연출. 앙투안의 계획은 환상이 깨진 빅토르가 정신을 차리고 마리안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마르고는 앙투안의 잔인한 연출에 다시 분노를 터뜨린다. 앙투안은 뛰쳐나가는 마르고를 붙잡고 사랑한다 고백한다. 마르고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자석처럼 이끌린다. 사랑이란 게 복잡하면서도 단순하다. '사랑한다'는 진심어린 말 한 마디를 못 들어서 토라지고, 또 단 한 번을 들었다고 다시 마음을 오려붙일 수 있다.

 

갈 곳 없는 빅토르는 넋이 나간 채 집으로 돌아온다. 자신의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마리안과 친구를 봐도 별다른 감흥이 없다. 빅토르는 그간 겪은 일을 담담히 이야기한다. 그리고 만화를 다시 그렸으니 한 번 보라며 화첩을 건네곤 다시 떠난다. 미련이 없어 보인다.

 

이번에는 마리안이 세트장을 찾는다. 카페에는 빅토르가 앉아 있고 둘이 처음 만난 날이 연출된다. 마리안은 삶은 달걀과 설탕을 주문하곤 빅토르와의 설레는 첫만남에 몰입한다. 마리안은 수십 년 전 그랬던 것처럼 스카프를 떨어트리고 카페를 떠나지만 빅토르는 스카프를 주으러 가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 정도 결말에 만족한 듯 끝을 내버린다.

 

아무래도 빅토르는 예전처럼 마리안을 사랑할 수 없나 보다. 동상이몽의 연속. 그래도 둘은 뭉근한 사랑을 이어나갈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둘이 휘황찬란하게 사랑했던 일은 단 한 번도 재현되질 않는다. 오로지 앙투안의 증언을 통해 잠시 드러날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아름다운 시절을 상상해 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수많은 감정이 오갔고 마음이 꽤 충만해졌는데, 다시 돌이켜 보니 영화의 어떤 점이 좋았다고 한 마디로 요약하기가 어렵다. 잘 모르겠다.

 

거금을 들여 원하는 옛 시대로 돌아가 본다는, 상상력 넘치고도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설정. 결국 사랑은 돌아오지 않은, 서로의 착각과 오해가 지독하게 어긋난 설정. 섬세한 만화가 지망생과 저돌적인 의대생의 이질적인 만남. 분노 조절이 어려운 연출자와 아름다운 배우의 또라이 같이 격정적인 사랑. 불륜도 결국은 현실 도피성 착각일 뿐이라는 일갈.

 

 

사랑이건 우정이건, 소중한 이가 있다면 존재부터 감사해야 한다.

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것처럼 질기고 강렬한 인연은 현실에서 쉽게 생기지 않으니까.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없듯이, 모두가 근사한 사랑에 빠질 수는 없다.

 

 

2020-06-10 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