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빛(幻の光, 1995)

1.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홍보 문구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데뷔작 <환상의 빛>. 그의 세계는 처음부터 완성형이었고 고결했다. 다음 작품인 <원더풀 라이프>와도 꽤 유사한 느낌.

 

2. 주인공 유미코는 어릴 적 할머니가 치매에 걸려 종종 집을 나간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고향에 가야 한다며 짐을 싸서 떠났다. 유미코는 할머니를 찾을 때마다 혼신을 다해 막았다. 애원하는 유미코와 고향에 가고 싶은 할머니. 어느날 할머니는 사라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유미코의 부모는 태연하고도 지친 태도로 방관한다. 애가 타는 마음과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어른이 되어서도 유미코를 짓누른다. 여전히 할머니 꿈을 꾸면서 힘겹게 깬다.

 

3. 유미코는 결혼을 했다.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된 아기도 있다. 남편 이쿠오를 사랑한다. 신혼의 단꿈, 설렘에 푹 빠져있다. 잠깐이라도 더 그를 눈에 담고 싶어서 일 나가는 남편을 골목 어귀까지 배웅한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쿠오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든 유미코는 낯선 노크 소리에 깨어난다. 순경 둘이 서 있다. 철로를 걷다 기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소지품을 확인해 달라고 한다. 경찰서에 도착한 유미코는 물건을 확인하고는 남편이 어딨냐고 묻는다. 순경은 태연히 말한다. 어차피 알아볼 수 없을 거라고.

 

4. 이쿠오의 사인은 자살이다. 기차가 그렇게 빠르지도 않았고 귀를 찢는 경적 소리며 눈부신 빛이며 피하려면 피할 여력은 충분했다. 기관사는 이쿠오의 마지막 순간을 보았다. 이쿠오는 빛에도 소리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철로 위를 산책하듯 걸었다.

 

5. 유미코는 생각한다. 이쿠오는 왜 자살을 한 걸까. 그렇게 행복했는데. 나 혼자만의 행복이었을까. 같은 동네에서 나고 함께 자랐다. 이쿠오를 다 안다고 생각했다. 아마 누구보다 이쿠오를 잘 아는 존재였을 것이다. 유미코는 넋이 반쯤 나갔다. 이쿠오의 눈을 더 제대로 들여다 보지 않은 것. 이쿠오의 말을 더 진지하게 듣지 않은 것. 유미코는 후회했을까? 유미코의 꾹 다문 속마음은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짧은 대사로 표현된다.

 

6. 7년이 지났다. 유미코는 세 들어 살던 주인의 중매로 재혼을 한다. 오사카를 떠나 작은 섬마을로 간다. 아들에겐 누나와 아빠가 생겼다. 새 가족이다. 남편도 가족도 다정하다. 다시 행복해졌다. 그러나 할머니와 이쿠오의 죽음은 늘 그림자처럼 유미코의 마음 한편에 드리운다.

 

7. 유미코의 상실과 애도, 회복과 치유가 이 영화의 주제다. 섬세하고 고결한 마음을 차근히 들여다본다. 6번까지 나열한 이야기는 이 영화의 초반부에 불과하다.

 

8. 원작 소설이 있다. 미야모토 테루라는 거장 소설가다. 원래 카피라이터였는데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집어든 유명 작가의 소설책이 너무나도 재미없어서 본인이 직접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무래도 책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