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Hillbilly Elegy, 2020)

동명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한 영화. 2016년, 실리콘벨리에서 꽤 잘 나가는 벤처 캐피털리스트 제임스 데이비드 밴스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냈다. J. D.(제이디)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저자는 애펄레이처(애팔래치아)라는 문화권에서 자랐다. 애펄레이처는 북미 동쪽을 관통하는 산맥 이름이기도 해서 캐나다를 비롯해 굉장히 광활한 지역을 포함한다. 지리적으로 고립된 환경이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오랜 세월 꽉 막히고 폭력적이고 교육 수준이 낮은 것으로 알려져 왔다. 제이디가 자란 곳은 이 애펄레이처 문화권에 속하는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이다. 

 

제이디가 이 책을 냈고, 같은 해 미국 대선 결과는 전 세계인을 경악에 빠트렸다. 미국의 주요 매체는 이 책을 통해 트럼프의 주요 지지층인 가난한 백인 계층을 이해하기로 했나 보다. 그 덕분에 이 책은 2년 연속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제이디는 싱글맘 엄마가 열아홉에 낳은 누나와 함께 자랐다. 친부는 제이디가 태어나자마자 양육권을 다 버리고 친모와 이혼했다. 엄마는 이후 여러 남성을 만나 재혼과 이혼, 동거와 결별을 반복해왔다. 자연스럽게 두 남매는 조부모의 손을 많이 타게 된다. 간호사인 엄마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분노 조절 장애까지 있어 늘 사고를 쳐댔다. 누나 린지는 남자친구와 붙어다니느라 바빴고. 모든 상황이 벅찬 제이디가 범죄 행위를 벌이는 지경에 이르자 할머니는 제이디를 자신의 집에 데려가 보살피기로 한다.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가정 환경과 도시 분위기 속에서 제이디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고 일러준 것이 할머니다. 세월이 지나, 제이디는 해군에 입대해 이라크 파병을 가기도 한다. 이후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학사를 받은 뒤 예일대 로스쿨에도 진학해 박사 학위를 받는다.

 

사실 영화는 초반부터 제이디의 로스쿨 라이프를 보여준다. 인턴십 채용에 도전해 법조계 여러 인사를 만나고, 본질적인 문화 차이를 체감하며 힘들어 하는 모습. 다행히도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여자친구 우샤가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그리고 제이디는 누나의 전화를 받는다. 엄마가 또 약에 손을 댔다고 말이다. 이미 가정을 꾸려 아이 셋을 키우랴 제 일을 하랴 바쁘고 벅찬 누나는 제이디에게 S.O.S를 부른다. 제발 와달라고. 다음날 아침에 면접이 있다고 해도, 제발, 와달라고. 제이디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로 제이디의 어린 시절이 끼어들며,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제이디의 엄마 역으로는 에이미 아담스가 나온다. 굉장히 살을 찌워서 열연을 펼친다. (그런데 미모를 숨길 수는 없다. 살이 저렇게 쪄도 순정만화 찢고 나온 것처럼 생겼어 에이미 아담스는!) 할머니 역으론 글렌 클로스. <101마리 달마시안> 말고는 본 영화가 없어서 누구신지 잘 몰라보겠다. ㅜㅜ 아무튼 대배우임엔 분명하다. 제이디 역으로는 배우 가브리엘 바소가 통통하게 살을 찌워 출연했다.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삶의 무게를 짊어진 힘든 청년 연기를 아주 훌륭하게 해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제이디 가족의 실제 사진이 슬라이드쇼처럼 나오는데, 배우들이 실제 인물의 외모를 비슷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또 외모가 비슷한지를 최우선순위로 두고 캐스팅했다는 것을 매우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누구 하나 안쓰럽지 않은 이 없는 영화.. 사람 냄새가 물씬, 지나치게 나네. 인간의 성장과 특히 '포기하지 말 것'에 관한 주제의식이 잘 전달되는 영화. 영화 자체로는 혹평이 대부분이다. 글렌 클로스의 연기만큼은 극찬을 받고 있는 듯. 그런데 이게 실화라는 걸 알고서 보면 영화의 짜임새고 뭐고, 많이 숙연해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제목의 '힐빌리'는 가난한 하류층 백인을 부르는 표현. 미국에선 백인들 중에서도 아일랜드계, 스코틀랜드계, 이탈리아계 등 일부 인종에 관한 차별이 있어왔다고 한다. 이들 출신이 일용직이나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레 돈을 못 버니까.. 돈으로 사람 판단하는건 동서고금 지긋지긋하네.. 아무튼 제이디의 혈통도 마침 스코틀랜드+아일랜드다.

 

'elegy'는 슬픈 노래라는 뜻인데, '애가' '비가'라는 표현을 쓰면 너무 무거워 보일까 봐 '노래'라고만 번역한 걸까? 좀 아쉽다..

 

제이디는 이미 자수성가했고 베스트셀러도 냈고 영화화까지 이뤘다. 무엇보다, 제이디에게 유년시절을 글로 써보라고 제안한 로스쿨 교수의 안목이 참 대단하다 싶다.